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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경 인물 시리즈 《작은 야고보》
    성경 인물 시리즈 예수님의 12제자 중 《작은 야고보》입니다. 작은 야고보에 관하여는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보다 나이가 어렸거나 키가 작은 데서 붙여진 것으로 이해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성경에서도 그는 ‘작은 야고보’로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멀리서 바라보는 여자들도 있었는데 그중에 막달라 마리아와 또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있었으니』 막15:40 그는 12제자 명단에서 소개할 때, 단지 알패오의 아들이라는 것뿐이며 다른 행적이 전해지지 않고 있어서 그를 소개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작은 야고보 역시 여느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제자로서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 노력했던 사실을 분명합니다. 그는 예수님을 스승으로 섬기며 3년 동안 가르침 받고 수종을 들며 하나님의 나라와 각자에게 주시는 사명을 감당하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또한 십자가와 부활을 목격한 증인으로서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강림이 있던 때에는 성령 충만함을 받고, 마지막 주님의 명령에 따라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행1:8 작은 야고보의 사역에 관하여 설명을 드리자면, 먼저 성경에 등장하는 세 명의 야고보를 이해해야 하는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게시해 드린 큰 야고보에 대하여는 게시 글을 참조하시고 오늘 게시되는 작은 야고보에 관해서는 성경 말씀을 토대로 예수님과 형제였던 야고보를 비교해서 설명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에 관하여는 사도행전 15장의 내용으로 예루살렘교회에 회의가 열리게 되었고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이방인들에게 율법을 어떻게 적용을 시킬 것인가? 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우리도 감당치 못한 부분을 그들에게 요구하는 건 적절하지 못하며 저들도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 줄 아노라"(행15:7-11) 라고 주장을 하였습니다. 베드로의 발언이 끝나고 다음으로 야고보가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가 있다면 그들을 율법 때문에 힘들게 하지 말자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은 것과 그 피를 멀리하라고 이야기를 하자"(행15:13-20) 라고 주장하였고 그 주장이 관철되었습니다. 그의 주장은 유대교적 교리에서 크게 벗어나는 것도 아니었으며 모여 있던 모든 사람에게 공감을 줄 수 있는 주장이었기에 관철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명확하게 주장했던 야고보는 이미 헤롯에 의해 죽음(행12:1)을 당한 큰 야고보가 아닌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였습니다. 고전 15장에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12제자와 야고보를 구분하여 보이신 부분을 기록하고 있는데 게바에게, 열두제자에게, 오백여 형제에게, 야고보에게 순으로 보이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성경의 구절을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은 예루살렘교회 회의에서 발언한 야고보는 큰 야고보나 작은 야고보가 아닌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15장에 등장하는 알패오의 아들 "작은 야고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시는 장면을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지켜보았습니다. 알패오의 아들 작은 야고보 어머니의 이름이 마리아였다는 것과 그 어머니의 아들이 ‘요세’였습니다. 알패오의 아들 작은 야고보 어머니의 이름이 마리아였다는 것과 그 어머니의 또 다른 아들이 ‘요세’였음을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습니다. 『멀리서 바라보는 여자들도 있었는데 그중에 막달라 마리아와 또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있었으니 이들은 예수께서 갈릴리에 계실 때에 따르며 섬기던 자들이요 또 이 외에 예수와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온 여자들도 많이 있었더라 』막 15:40-41 ‘요세’라는 이름은 헬라어 발음으로서 야고보의 다른 형제일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이를 증거로 예수님 제자들의 이름을 살피면 알패오의 아들 작은 야고보와 같은 아버지의 이름이 등장하는데 알패오의 아들 레위입니다.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막2:14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감림을 기다리던 제자들의 이름을 거명할 때도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고 묶어서 기록하고 있는 것을 증거로 그들이 형제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으며 많은 학자들도 그들이 형제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사도들의 사역을 찾아볼 수 있는 복음서나 사도행전에서 작은 야고보의 사역을 찾을 수는 없지만 유명한 기독교 역사학자인 유세비우스는 작은 야고보에게 ‘낙타무릎을 가진 사도’ 라는 별명을 지어주었을 정도로 기도에 힘쓰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님의 기도하는 습관을 가장 많이 닮은 제자가 야고보였다고 전해집니다. 작은 야고보는 우리에게는 별로 알려지지는 않은 사도지만 그는 분명히 주님으로부터 하나님 나라 사역을 위하여 뽑힘을 받은 제자였고 주님과 함께 이 땅에 복음 전도사역을 함께 감당하였던 신실한 사도였습니다. 부정 축재로 재물을 많이 모았던 마태를 형으로 둔 작은 야고보는 부유한 삶에서 부러움 없이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형 레위 마태를 따라 예수님을 만난 뒤에는 조용히 기도하는 사역으로 자신이 나서면 주님의 영광을 가리울까 조바심 내던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사명에 충실히 기도하며 순종했고 오직 예수님의 가르침에 열중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작은 야고보는 시리아에 선교를 가서 목숨 걸고 복음을 전했으며 예루살렘에 돌아와 전도를 하다가 스데반 집사처럼 기독교를 박해는 하는 사람들에 의해 모질게 돌에 맞았으나 숨이 끊어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를 지켜보던 유대인들이 살아있는 작은 야고보를 톱으로 켜서 죽었다고 전해집니다. 그의 시신은 예루살렘이 묻혔다가 나중엔 콘스탄티노플에 옮겨졌고, A.D. 572년에 다시 로마로 옮겨졌다고 전해지며 그의 시신이 묻혔던 곳에 ‘성 야고보교회’가 세워졌다고 합니다. 이 교회를 훗날 ‘거룩한 사도의 교회’라고 별도의 이름이 붙여졌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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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5-09
  • 성경 인물 시리즈 《대(大)야고보》
    성경 인물 시리즈 예수님의 12제자 중 《대(大)야고보》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야고보는 세 사람이 있습니다. 이들 중 한 사람은 예수님의 육적 형제인 야고보와 예수님의 12제자 중 두 명의 제자입니다. 복음서를 기록한 저자들 역시 예수님의 12제자 중 ‘야고보’라는 이름을 구분하는 방법으로 이름 앞에 그들의 아버지 이름을 거명하는 것으로 각각 다른 사람임을 명시했습니다. 성경에서 그들을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로 구분합니다. 오늘은 요한의 형이었던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에 대해 게시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또 다른 사도인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동명이인이라 혼동을 피하기 위해 흔히 ‘대(大)야고보’라고 하며 베드로 요한과 더불어 예수님의 핵심적인 제자였습니다. 복음서 기자들은 그를 동생 요한과 같이 다혈질적인 성격이었던 것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그 역시 “우뢰의 아들”이라는 별칭을 예수님께서 지어주셨던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열둘을 세우셨으니 시몬에게는 베드로란 이름을 더하셨고 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 또 안드레와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및 다대오와 가나나인 시몬이며 또 가룟 유다니 이는 예수를 판 자더라』 막3:13-19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요한과 더불어 야고보를 변화산에도 동행시키셨고, 시몬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실 때도, 야이로의 딸을 살리실 때도, 마지막 기도하시던 겟세마네 동산에도 동행시키심으로 그에게 영적 무장과 더불어 온전한 복음을 전하게 하시기 위한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세베대의 두 아들인 요한과 야고보를 특별하게 훈련시킨 목적과 그들의 성격과 삶의 정도를 잘 드러나는 사건은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사마리아인들이 거주하는 지역에 들어갔을 때 자신들을 환대해 주지 않자 그들에게 불로 멸하게 하자고 제안을 했던 것입니다. 그들의 어머니 세베대의 아내 살로메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을 앞두신 시점에 두 아들 요한과 야고보를 위해서 주의 나라가 임하면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해달라고 청탁을 하는 것으로도 삶의 정도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청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구나! 너희는 내가 마시고자 하는 잔을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을 고난의 세례를 받을 수 있겠느냐?” 라고 그들에게 묻습니다. 그러자 야고보와 요한은 “예, 할 수 있습니다.” 라고 대답을 했고 이 대답에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순교의 잔을 마시고 고통의 세례를 받을 수는 있다. 그러나 나의 오른편이나 왼편에 앉는 특권은 내가 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이들을 위한 것이다.” 라고 답해 주셨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다른 제자들이 야고보와 요한의 야심에 화를 내자, 예수님께서는 너희들 중에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며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종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온 것이다”라고 훈계하심으로 권력의 목적은 봉사하는 것으로서 다른 사람들에게 무엇인가를 강요하거나 그들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야고보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14년쯤 지나 로마 헤롯 아그립바 1세가 유대인들의 환심을 얻기 위해서 초대 기독교인의 교회 중 몇 사람을 죽이려고 했을 때, 12제자 중 최초로 순교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헤롯 아그립바는 교회 중에서도 특히 눈에 띄고 열심히 복음을 전하며 말씀을 선포하는 사람을 골라서 죽이고자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당시 교회에서 열심히 사명을 감당하던 사도들 중 특별하게 이름을 떨치고 있던 사도를 선택을 했을 것이고, 시범적으로 야고보를 선택해서 죽였을 것입니다. 『그 때에 헤롯 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에서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행12:1-2 이렇듯 12제자 중 최초의 순교자이기에 전해 내려오는 자료가 많지 않으며 순교하기 전까지 스페인에서 수년간 선교활동을 하였다고 전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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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재
    2023-05-09
  • 성경 인물 시리즈 《빌립》
    성경 인물 시리즈 예수님의 12제자 중 《빌립》 입니다. 공관복음서(마태, 마가, 누가복음) 기자들에 의하면 빌립은 그다지 중요한 인물로 묘사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빌립의 이름은 예수님의 12제자 중 한 사람으로 거명이 될 뿐 그 외에는 언급되는 사건은 물론이고 묘사조차 없다는 것으로 이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심령을 정화시켜 육적인 삶에서 영적인 삶으로의 전환하는 방법을 깨닫게 하시고 영안을 열어 주신 요한의 기록에는 빌립에 대하여 4가지의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자신이 세례요한의 제자로서 예수님을 가리키며 “하나님의 어린양” 이라는 세례요한의 말에 안드레와 함께 예수님을 따르며 이튿날 예수님께서 갈릴리 나가려 하시다가 안드레와 한 동네 벳세다 사람 빌립을 만나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에게 있어서 특이점이라면, 자신들은 세례요한의 제자들로서 열심을 가지고 죄에 대해 알고자 노력하였고 실천하였으며 메시아를 찾고자 노력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빌립은 그저 조용하고 그리 인상적이지도 않으며 평범한 유대인이었던 그에게 찾아가 자신들에게 물으셨던 “무엇을 구하느냐?”라고 묻지도 않으시며 예수님께서 찾으시던 양처럼 단번에 찾아가셔서 앞장서시며 “나를 따르라”고 명령하셨다는 것은 예수님의 복음을 들을 수 있는 최적의 상태에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빌립은 예수님의 만나 “나를 따르라”는 말에 곧바로 따라가 가르침을 받았으며 바로 나다나엘을 찾아가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다.”라고 말했습니다. 나다나엘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는 말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에게 했던 말씀이신 “와서 보라”는 말로 전도를 했던 것입니다. 빌립은 유대인들의 율법서인 모세 5경과 선지서에 식견을 가지고 있는 유대교 신앙의 특별함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고 선지서에 예언되어 있는 메시아를 대망하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나다나엘에게 “선지가가 기록한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라”는 말은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다윗의 자손이며 임마누엘의 메시아를 묘사하기에 충분한 조건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그의 심정을 아시는 예수님께 제자의 한사람으로 택함을 받게 되고 다른 제자들과 함께하며 여러 가지 가르침과 “귀신을 내어 쫓고 병을 고치며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사도”로 사역을 시작하게 됩니다. 예수님과 함께 사역을 시작하고 권능으로 인해서 많은 기적이 나타나 많은 무리가 따랐고 몰려드는 군중들에게 먹이실 것을 생각하셨을 때, 빌립에게 한가지 질문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이 질문이 빌립에게 주어졌다는 것에 대한 요한의 이해는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는 내용으로 제자들 가운데 아직 확신의 믿음이 부족한 빌립에게 불가능이 가능하게 되는 전능자 하나님의 섭리를 보여주고자 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빌립은 예수님의 질문에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합니다.” 라는 것이었고 이는 그의 믿음이 아직 성숙하지 못한 이성적이고 인본주의적인 믿음이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그저 다른 사람들보다 깨달음이나 능력이 많은 정도의 사람으로 생각을 했던 것이며 자신이 타산적인 것처럼 예수님 역시 타산적일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명하셔서 군중을 한 오십 명씩 떼를 지어 넓은 잔디에 앉게 하시고 안드레가 군중 속 한 아이가 가지고 있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축사하시고 나눠 주셨습니다. 그것을 받아먹은 사람의 수는 약 오천 명쯤 되었고, 그들이 배불리 먹고 남은 것이 열두 바구니에 찼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신 것은 빌립과 다른 제자들을 비롯한 따르던 군중으로 하여금 능력과 은혜가 충만하신 하늘에서 내려온 산 생명의 떡이심을 나타내시기 위함이었음을 후에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6장 51절 예수님의 사역 중 마지막 유월절에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을 때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 헬라인 몇이 빌립에게 가서 예수님을 만나게 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이 헬라인들은 이교도들로서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들로 유월절을 지키려고 예루살렘에 올라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유대교 적 메시아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궁금증과 인간의 삶의 목적을 정하는 데 중요한 지침으로 예수님을 만나고 싶은 소원을 품고 방도를 강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에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말씀은 유력 유대인들의 반대가 심했고 예수님께서도 유대인들에게만 말씀을 가르치셨기 때문에 빌립은 동향 사람 안드레와 상의한 후 그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갔습니다. 빌립이 데리고 온 헬라인들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따르는 군중들을 향해 생명의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요한복음 12장 23절부터 25절 예수님께서는 선민 유대인들의 핍박과 반대로 이방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방인들을 위한 구원의 과정으로 먼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게서 그들의 대속으로 죽으시고 그 죽음으로 부활 승천하셔서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심을 유대인뿐만 아니라 헬라인과 온 인류를 위한 구속의 죽음이시라는 것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한 알의 밀이 떨어져 썩어 없어질 것처럼 보이지만 그 속의 생명이 발육하여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은 자연적으로도 당연한 이치인 것처럼 예수님의 구원을 자연적인 이치를 설명하고 계신 말씀인 것입니다. 이는 믿음이 부족한 빌립의 전도이자 선교로서 유대인에게 이방인인 헬라인을 예수님께 데리고 온 것 자체가 그의 사명이었으며 그로 인해 예수님께서 다시금 선포하시기를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시니』 요한복음 12장 27절부터 28절 빌립이 예수님께 헬라인을 데리고 간 것은 스스로 잘한 일인지 잘못된 일인지 주저하며 알지 못했으나 예수님의 말씀으로 또한 하늘에서 울리는 소리로 인해서 율법 시대의 끝을 알리고 복음의 새 시대를 여는 계기를 마련했던 것입니다. 이 사건이 있은 지 몇 시간이 되지 않아서 빌립은 다른 제자들과 함께 다락방에서 최후의 만찬을 나누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계명을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요한복음 14장 1절부터 4절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요한복음 14장 1절부터 4절 이 말씀에 의심 많은 도마가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습니까?” 라고 주저하게 됩니다. 도마의 주저함에 예수님께서는 다시금 제자들에 말씀해 주십니다. 『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 요한복음 14장 6절부터 7절 예수님의 진지하신 말씀에도 빌립은 연약한 믿음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보다 더 분명히 알고 싶은 심정에서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옵소서 그리하며 족하겠습니다.” 라고 놀라운 발언을 했습니다. 빌립은 자신이 율법서나 선지자들의 기록을 통해서 알고 있었던 하나님을 보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는 모세에게 임했던 하나님, 이스라엘의 장로들에게 임했던 하나님, 이사야에게 임했던 하나님을 육안으로 볼 수 있는 하나님 영광의 광채를 직접 보기 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빌립의 연약한 믿음을 보여주는 사건으로써 후에 요한의 기록에 증거한 “말씀이 육신이 되신 하나님”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하나님”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빌립의 놀라운 발언에 예수님께서는 빌립에게 권면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요한복음 14장 9절부터 11절 예수님께서는 빌립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옵소서 그리하며 족하겠습니다.” 라는 말에 그렇게 오랫동안 나를 따라다니며 같이 했는데도 아직 알지 못하느냐? 라는 책망은 메시아라고 고백하며 따른 시간들의 허무함을 책망한 것입니다. 그가 그렇게 갈망하며 찾아 헤매던 메시아와 3년이라는 시간을 함께하고도 알지 못하였다는 것은 그가 지금까지 드렸던 기도의 목적도 몰랐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빌립을 비롯한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기도에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이룰 것이라는 것을 믿지 못하는 것도 책망의 이유였던 것입니다. 빌립을 책망하신 예수님께서는 예수님과 하나님께서 하나이신 이유를 설명하셨고 그럼에도 믿음이 부족하다면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을 보고 믿으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책망과 진리의 말씀을 듣고 빌립은 말문이 막혀 버렸고 예수님께서도 더 이상 빌립이나 제자들을 질책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빌립의 질문으로 하여금 중요한 말씀들을 남기셨는데 요한복음 14장 9절 이하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로 시작하는 진리의 말씀은 21절까지 이어지며 내용으로는 하나님에 대한, 사역에 대한, 기도에 대한, 성령에 대한, 복음에 대한 가르치심이었습니다. #성경인물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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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재
    2023-05-02
  • 성경 인물 시리즈 《시몬》
    성경 인물 시리즈 예수님의 12제자 중 《시몬》 입니다. 열심당원이었던 가나나인 시몬(Simon the Zealot)의 사역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가 속해 있었던 열심당원의 의미와 당시 사회에서 자신들의 사상과 환경에 맞게 여호와 신앙을 지키고 행동했던 배경을 이해해야 합니다. 제자들이 활동할 당시,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는 유대민족에게 죽은 황제를 신으로 숭배하라고 하는 로마의 황제숭배 사상 강요에 반발한 유대인들이 항쟁을 일으켰습니다. 그들 중 ‘열심당원’ 이라고 하는 무리들은 다윗의 자손으로 기름 부음을 받은 유대인만이 세상을 다스릴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며 로마제국에 대항하였습니다. 이들은 66년에서 70년에 걸친 대대적인 유대인 반란인 제1차 유대-로마 전쟁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던 것입니다. 열심당원에 의해서 66년 예루살렘을 장악하여 4년간 버텼으나 70년에 로마군이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성전을 파괴하는 것으로 전쟁이 끝났습니다. 이들의 태동과 역사는 갈릴리와 유대의 민중들의 가뭄과 굶주림으로 고통받던 40년 말기에 그들의 비폭력 투쟁이 대제사장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고, 비폭력이지만 투쟁에 가담한 유대인들을 로마의 평화를 위협하는 비적으로 본 로마제국의 폭력에 의해서 진압당한 모습을 보면서, 대항폭력 곧 테러리즘으로 투쟁함으로써 지배계급의 이목을 집중시키고자 하였습니다. 식민지 사회에서 지배계급보다는 지배계급에 협조하는 특권계급을 공격하는 것이 특징인데, 열심당원들도 로마제국에 협조하던 대제사장을 공격하였습니다. 그들은 로마의 평화 유지를 위한 로마제국의 착취, 제국에 기생하는 대제사장, 가뭄으로 인한 굶주림과 로마의 평화를 위협하는 민중운동을 레기온과 십자가형으로 탄압하는 폭력에 대한 갈릴리와 유대 민중들의 시위였던 것입니다. 유대와 로마 전쟁에 참전 후 로마군의 포로가 된 뒤 당시 상황에 대해 기록을 남긴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1세기 당시 유대인들이 4개의 중요한 집단, 즉 바리새인, 사두개파, 에세네파, 혁명론자로 구분했으며 "열심당"은 혁명론자에 속하는 부류라고 기록했습니다. 요세푸스가 구분했던 4개의 중요 집단을 설명해 드리자면, 에세네파는 공동체 생활을 통해 비정치적으로 은둔에 가깝게 신앙을 지켜갔고, 약대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광야에서 회개와 천국을 외쳤던 세례요한이 에세네파 제사장의 아들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파는 체제를 위협하지 않는 한 종교 문제에 대해 간섭하지 않는 로마제국에 어느 정도 타협하며 유대교 신앙과 율법에 관한 논쟁을 벌였습니다. 《바울이 그중 일부는 사두개인이요 다른 일부는 바리새인인 줄 알고 공회에서 외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내가 심문을 받노라 그 말을 한즉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에 다툼이 생겨 무리가 나누어지니 이는 사두개인은 부활이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 하고 바리새인은 다 있다 함이라 크게 떠들새 바리새인 편에서 몇 서기관이 일어나 다투어 이르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니 악한 것이 없도다. 혹 영이나 혹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으면 어찌하겠느냐 하여》 사도행전 23장 6절부터 9절 《수일 후에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가 베스도에게 문안하러 가이사랴에 와서 여러 날을 있더니 베스도가 바울의 일로 왕에게 고하여 이르되 벨릭스가 한 사람을 구류하여 두었는데 내가 예루살렘에 있을 때 유대인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그를 고소하여 정죄하기를 청하기에 내가 대답하되 무릇 피고가 원고들 앞에서 고소 사건에 대하여 변명할 기회가 있기 전에 내주는 것은 로마 사람의 법이 아니라 하였노라 그러므로 그들이 나와 함께 여기 오매 내가 지체하지 아니하고 이튿날 재판 자리에 앉아 명하여 그 사람을 데려왔으나 원고들이 서서 내가 짐작하던 것 같은 악행의 혐의는 하나도 제시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들의 종교와 또는 예수라 하는 이가 죽은 것을 살아 있다고 바울이 주장하는 그 일에 관한 문제로 고발하는 것뿐이라》 사도행전 25장 13절부터 19절 이들은 무너진 이스라엘의 현실에서 자신의 삶을 위해 마태의 편에서 언급했듯이 재물을 탐했던 세리들과도 어느 정도 타협하며 지위를 이용해 실속을 차렸습니다. 그러나 열심당원들은 로마에 대한 정치적 투쟁을 우선으로 여겨 과격한 행동도 서슴지 않고 수행했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사회의 배경에서 지배계급들이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대립하였으나 로마제국의 수탈과 폭력에 고통받던 유대 민중들에게는 열심당원이 많은 지지를 받았습니다. 요세푸스는 제1차 유대-로마 전쟁이 성전의 파괴로 이어지기까지 열심당이 죽임을 일삼는 ‘공포의 지배’를 펼쳤다고 부정적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당시 사료들도 열심당원들을 '유대민족의 적'으로 판단되는 이들을 공개적으로 죽일 정도로 과격한 민족주의 전사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로마제국은 이들을 십자가형으로 공개처형 했는데, 예수님의 양옆 십자가에서 처형된 '강도 두 사람도 실제로는 강도가 아니라, 열심당원이었거나 적어도 로마제국에 반대하여 십자가형에 처해진 자들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가복음서 15장 27절에 나오는 강도 두 사람은 헬라어 레스타이(lestai)를 번역한 말인데, 이 단어는 열심당원이라는 뜻도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는 시몬 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두 명이 있는데 한 명은, 베드로의 옛 이름인 시몬 이며,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부르실 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라고 부르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요한복음 21장 15절 다른 한 명의 시몬이 오늘 설명해 드릴 제자로서 성경은 그를 가르쳐 "가나안인 시몬" 이라고 부르며 그가 가나안 출신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를 표현하기를 "셀롯(Zealot)" 이라 하는 시몬이라고 표현을 하는데 이 단어의 뜻은 유대교의 한 종파로써 이들을 ‘열심당원’이라고 칭했습니다.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셀롯이라는 시몬과』 누가복음 6장 15절 셀롯이라고 하는 열심당원을 우리말 표현으로 한다면, 독립군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시몬은 열심당원으로 예수님을 만나기 전부터 이스라엘의 독립을 위해서 목숨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었던 사람이며,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남다른 사람이었습니다. 그에 있어서 민족과 나라를 위하는 열망과 열정은 예수님을 만난 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열망으로 변화되었고 성령 충만을 받은 후에는 소아시아와 이집트, 그리고 흑해를 건너 영국에까지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열심당원의 임무는 각자의 자리에서 활동하며 상부의 지시가 있으면 로마와 부역하는 제사장이나 일반인들을 암살하거나 로마의 군대와 대항하여 싸우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독립을 위해 어느 때에든지 목숨을 바쳐 싸워야 하기 때문에 항상 몸에 칼을 지니고 다녔다고 합니다. 오늘의 주인공 셀롯인 시몬 외에도 시몬 베드로 역시 칼을 지니고 다녔기 때문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을 잡으려고 온 대제사장의 군병 중 말고라는 사람의 귀를 칼로 베었는데 그 칼을 베드로가 품속에 늘 품고 다녔다고 합니다. 그래서 혹자는 베드로도 열심당원이었을 것이라고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 시몬이 열심당원이었다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성경에서 그의 사역에 대한 부분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또한 그가 12제자에 속해 있다는 것만 기록되어 있을 뿐 그가 어떻게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는지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시몬이 예수님의 제자가 된 배경을 추측하자면, 열심당원으로서 평소 비밀스러운 첩보활동을 하던 중 혁명적인 유대교의 가르침을 설교하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감동되어 그의 적극적인 성격으로 예수님을 따랐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이스라엘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쳐 최선을 다했던 그가 예수님을 따르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시몬을 보면서 예수님께서 그를 제자 중 한 사람으로 선택을 하셨을 것이라는 추측입니다. 그는 매사에 적극적이며 정보와 첩보에도 능했던 사람으로 예수님께서도 공생애 활동을 하실 당시 꼭 필요한 사람이었으며 당시 불의를 행하는 종교지도자들을 꾸짖고 회개시키는 데에도 시몬의 역할이 필요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시몬의 성격과 평소 그가 바라던 이스라엘의 독립을 대망하던 열정에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기 전 예수님께 드린 질문으로 시몬의 제자 됨을 추측합니다. 『그들이 모였을 때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사도행전 1장 6절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려라" 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한 제자가 갑자기 주님께 질문을 하는데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라고 묻습니다. 성경에는 이 질문의 주인공을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성격과 활동 사항을 살피면 이스라엘의 독립을 가장 원했던 사람이 열심당원 시몬이었고, 또한 그 꿈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 독립운동을 했었기 때문에 하늘로 승천을 준비하시는 예수님께 자신의 서러움을 토로하며 질문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시몬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는 알 바가 아니다" 라고 말씀하시며 질문했던 제자를 무안하게 만들었습니다. 이후 이어지는 말씀에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라는 말씀으로 이스라엘의 회복이 먼저가 아니라 복음의 세계 전파가 목적이 되는 것이며, 복음의 목적인 회개와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것이 제자를 삼으신 목적이라고 알려주셨습니다. 시몬도 예수님의 승천을 보면서 자신이 열망하던 이스라엘의 독립이 우선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선포가 먼저였음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시몬이 어떠한 사역을 했는지는 성경적인 기록이 전혀 없지만 1세기경에 기록된 제자들에 관한 자료들에서 시몬을 표현할 때 꼭 물고기 그림으로 표식을 한다고 하는 것에서 추측할 수 있는 사역이 있습니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이 로마의 박해를 피해 카타콤이라는 지하무덤에서 예배를 드릴 때, 그리스도인임을 알 수 있는 표식이 물고기 그림에 쓰여진 ΙΧΘΥΣ (익투스)라는 단어로 서로를 알아본다고 했었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우리의 구세주이시다" 라는 말의 첫 글자를 합하면 물고기라는 말인 익투스가 되는 것입니다. 이를 증거로 시몬은 아마도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에 크게 변화를 받아서 제일 열심히 복음을 전하러 다녔고 이스라엘의 독립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회복을 위하여 그의 생명을 걸었을 것입니다. 기독교 고문서 중에는 그가 처음에는 이집트에서 복음을 전했고 나중에는 최초로 영국에서 복음을 전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합니다. 이후에는 페르시아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이교도들에 의하여 톱으로 잘림을 받아서 순교를 당하였다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 오피니언
    • 연재
    2023-05-02
  • 성경인물 시리즈 《레위 마태》
    성경인물 시리즈 예수님의 12제자 중 《레위 마태》입니다. 인류역사상 가장 많이 호명 되고 가장 많이 알고 있는 호수를 꼽는다면 단연 기독교의 발상지 갈릴리 호수일 것입니다. 갈릴리 호수에서 시작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혁명 운동은 복음이라는 결과에 있어서 영구적이며 우주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인류의 역사에 있어서도 가장 널리 알려진 이름은 이 작은 호수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어부들인 베드로와 요한 그 형제 안드레와 야고보 등 예수님의 제자로 임명되고 복음을 전하던 갈릴리 호수의 어부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전한 생명력 있는 복음은 그들이 사역할 당시 기독교 박해자로 악명이 높았던 로마의 쥴리안 황제도 “갈릴리 사람이여 그대는 나에게 이겼도다” 라는 말로 복음의 생명력을 인정했다고 전해집니다. 오늘 전하게 될 “마태” 역시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와 요한의 형제 야고보 그리고 동생 작은 야고보와 빌립 등과 함께 갈릴리 사람입니다. 그의 본명은 알패오의 아들 레위였습니다.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마가복음 2장 14절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베드로라는 이름을 더해 주신 것과 같이 아마도 “레위”라는 이름에 “마태”라고 불러주심으로 그 호칭이 성경에 기록되었을 것입니다. 이를 증거 할 또 하나는 '마태'라는 이름이 의미하고 있는 뜻이 “하나님의 선물” 이라는 것을 들 수 있습니다. 그의 이름을 개명해 주신 이유도 예수님께 매우 가치 있는 인물이 되게 할 것임을 표시하기 위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의 직업은 “세리”였습니다. 그는 유대인으로서 적국인 로마제국 정부에게 고용되어 자기 나라 국민들에게서 로마를 위해 세금을 징수하는 직업이었습니다. 세리는 그 직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일반적으로 부정을 행하고 억압과 착취 그리고 뇌물을 받고 정한 세 외의 세금을 징수하는 것이 생활화 된 형태였습니다. 세례요한도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 때 세리들이 오는 것을 보고 그들의 악행을 지적했습니다.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이르되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 하고』 누가복음 3장 12절부터 13절 세리라는 직업은 유대교인들에게 악명 높은 직업이었으며,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이스라엘의 매국노였으며 수치스럽고 천시 받는 경멸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세리와 창녀” 나 “세리와 죄인”이라는 악명을 붙여 혐오스럽고 교활한 사람들이 하는 직업이었습니다. 정직한 사람이 하는 직업이 아니었지만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호숫가에서 몰려드는 군중들을 가르시고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그를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고 하셨습니다. 레위에게 있어서 “나를 따르라”는 명령은 자신이 자주 듣던 로마의 정치적 관계자의 명령보다 자신의 삶에 의미가 있는 왕이 신하에게 하는 명령과 같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명령은 예리하고 결정적인 권위에 찬 명령이었을 것이고 그 부르심은 레위가 지금까지 헤롯과 로마와 자신의 영역에서 가지고 있던 부정한 방법으로 취한 기득권과 선하지 않은 모든 관계에서 끊고 따라오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레위에게 “나를 따르라”는 명령으로 자신의 기득권과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못한 모든 관계를 끊으시라는 명령으로 지금까지 레위가 살아왔던 불의한 모든 생활 수단을 버리고 철저하게 예수님께 복종하고 전적으로 따르라는 명령을 하셨습니다. 이 명령에서 과거와 현재에 머물러 있는 명령이 아니라 복음을 위하여 장차 다가오는 환란과 공고한 사역에 동참하라는 미래를 위한 부르심이었습니다. 레위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부정 축재와 출세의 가망이 높았던 소득과 자리를 떨쳐 버리고 순종하여 따라 나선 것입니다. 이것은 레위 자신이 예수님을 찾고 택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먼저 그를 선택하시고 불러서 순종하게 하셨다는 것 또한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요한복음 15장 16절 레위는 악명 높은 세리였지만 그가 당시 지휘와 명예가 높았고 유대교 학식으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던 사람들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보다 먼저 부름을 받았다는 것도 중요한 사실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제자를 부르심에 있어서 직업과 외모를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 아니라 그 영혼의 상태를 보시고 부르신 것입니다. 사람이 보는 레위는 겉으로 악하고 비천한 사람이었지만 예수님께서 보시는 레위는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세상을 위해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며 복음을 감당하기에 적합한 그릇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레위를 부르셔서 “하나님의 선물” 이라는 뜻의 “마태” 라는 별칭으로 호명해 주시고 그에게 귀한 사역을 맡기신 것입니다. 이런 마태의 성격을 증거 할 수 있는 또 다른 이유는 마태가 직접 기록한 마태복음에서 12제자를 호명할 때, 자신의 이름 앞에는 그렇게 악명 높고 비천한 직업이었던 “세리”를 먼저 기입함으로 자신이 죄인의 삶을 살았던 과거를 고백하는 양심과 책임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빌립과 바돌로매, 도마와 세리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 마태복음 10장 3절 마태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부르심은 양심의 가책을 살아왔던 지난날의 모든 죄과를 씻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이었고 난생 처음으로 자신을 알아봐주는 구세주를 만난 기쁨이었을 것입니다. 이는 사도바울이 회개 하고 나서 자신이 바리새인으로서 “죄인 중에 내가 괴수”라고 고백했던 것처럼 타인에게 죄인으로 불리웠지만 항변하지 못하고 자기 자신이 뼈저리게 인정 할 수밖에 없었던 현실에서 벗어 날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입니다. 비록 재물의 정도는 자신이 상위계급이었지만 평소 평범한 삶을 그리워하던 이웃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는 조바심이 생긴 것입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고 이어서 바로 예수님과 제자들을 비롯한 자신과 동급계층에 있던 세리와 바리새인들을 초청해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마태복음 9장 10절 마태의 잔치는 아마도 자신이 알고 있던 구약의 전승에서 엘리사가 엘리야의 부름을 받았을 때 소 한 겨리를 잡고 기구를 불살라 그 고기를 삶아 백성들에게 주어 먹게 하고 일어나 엘리야를 쫓으며 수종을 들었 듯이 자신도 엘리사처럼 큰 잔치를 베풀고 세상과 고별하고 주님을 따르는 귀족의 절차를 따른 것으로 보여집니다. 『엘리사가 그를 떠나 돌아가서 한 겨릿소를 가져다가 잡고 소의 기구를 불살라 그 고기를 삶아 백성에게 주어 먹게 하고 일어나 엘리야를 따르며 수종 들었더라』 열왕기상 19장 21절 그러나 마태의 잔치는 그의 제자 됨을 기뻐해 주는 선량한 사람들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당시 마태와 동급의 부류였던 동료들과 바리새인 등 종교지도자들도 다수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잔치에 함께 있는 나사렛에서 온 젊은 청년의 종교 혁명 운동은 자신들의 생계를 위협하는 위험한 행동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이 곱지 않은 시선으로“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라며 유대교적 전통을 어겼다고 트집을 잡는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마태복음 9장 11절 그들에게 있어서 유대교적 전통으로는 세리나 죄인은 함께 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이율배반적으로 세리였던 마태의 잔치에 와 있는 상태였고 이는 평소 마태와 친밀하게 지내며 마태의 뇌물에 매수된 종교 지도자였을 가능성이 농후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형식적인 전통은 엄격한 것으로 죄인과 함께 할 수 없지만 죄에 대해서는 무감각해진 상태로 사는 종교지도자들이었습니다. 마태가 속해 있던 세리들에게는 매국노라고 손가락질 하고 가난하여 허름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하는 것으로 여겨 죄인취급을 했으며 매우 가증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런 그들에게는 예수님도 타락한 자로 보였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단 한 말씀으로 그들의 시비를 민망하게 만드셨습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9장 12절부터 13절 예수님께서 당당하게 말씀하시는 권위 있는 말씀을 듣고 마태는 자신의 선택에 만족을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심정을 진심으로 이해했을 것이며 전적으로 따르며 세밀한 행동까지 기억해서 그가 기록한 복음서에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12제자로 기록되었을 뿐 어떤 사역을 하였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지만 복음서를 기록함에 있어서 혹자는 “마태복음서는 모든 점에서 관찰할 때 기독교가 산출한 가장 중요한 책이다. 아직까지 이 이상의 책이 세상에 나온 것이 없다.”라고 평가를 했을 정도로 마태복음서를 세상에 내 놓은 것만으로도 그의 사역은 수많은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돌아오게 한 귀중한 사역이었습니다. 마태는 그의 복음서에서 한 분 왕과 그분의 백성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재물과 권위 그리고 각종 죄로 말미암아 망쳐진 하나님의 백성과 세상을 복음으로 회복시키시고 다시금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새로운 나라를 만드시고자 온 인류의 구속자를 보내신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 오피니언
    • 연재
    2023-04-24
  • 성경인물 시리즈 《바돌로매(나다나엘)》
    성경인물 시리즈 예수님의 12제자 중 바돌로매(나다나엘) 입니다. 바돌로매를 설명하기에 앞서, 그를 나다나엘과 동일한 인물로 보는 것이 개신교의 정설입니다. 오해 없으시길 바라며 이를 증거할 자료로는 마태복음 16장 17절에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칭하실 때, '바요나 시몬아' 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바돌로매’ 역시 ‘돌로매의 아들’ 이라는 뜻으로 본명은 ‘나다나엘’입니다. 또한 성경에서는 언제나 그를 전도했던 빌립과 연관되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돌로매에 관해서는 요한복음 처음 부분에서 그의 소명에 관한 자료와 마지막 부분에서 뿔뿔히 흩어지는 제자들 중에 있던 한사람으로 그리고 그 다음 이어질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마지막 지상사역을 마치시고 다시금 제자들에게 찾아오셨을 때 있던 일곱 제자 중 한사람으로 기록되어 있을 뿐입니다. 바돌로매는 가나 출신이며 빌립과 같은 성정을 가진 유대교 안에서 메시아를 대망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유대교 사람들이 회당에서 그리고 무화과 나무 우거진 그늘 아래서 또는 감람나무 그늘 아래서 자녀들에게 율법을 가르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교육을 받고 자랐듯이 그들 또한 그곳에서 교육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어린 시절에서부터 그곳에서 율법을 묵상하고 암기하며 예언의 말씀들을 배우며 기도하고 장래 자신의 길과 민족을 길 그리고 메시아에 대한 대망을 배웠을 것입니다. 바돌로매는 그런 교육이 생활이 되었을 것이고, 어려서부터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께서 자신을 포함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하신 메시야를 대망하던 기다림의 장소 역시 무화과나무 아래였을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함께 경전을 공부하고 묵상하며 암기했던 동료 빌립이 찾아와 기쁜 마음으로 말을 했습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가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나사렛 예수니라』 요한복음 1장 45절 바돌로매라고 별칭이 있던 나다나엘에게 나사렛이란 선한 곳이 날 수 없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선입견은 확신에서 나온 푸념이었을 것입니다. 나다날엘은 당시 나사렛에서 가까운 지역인 가나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부패한 도시 나사렛의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당시 나사렛 시가는 산기슭에 위치해 있고 산 밑으로는 큰 도로가 있어서 그 길로 로마군이 행진을 하였으며 온갖 장사꾼들이 모이는 하루 밤 묵기에 편리한 도시였습니다. 그렇게 교통과 숙박이 편한 도시의 문화는 소돔과 고모라로 칭할 수 있을 정도로 부패했던 것입니다. 나다나엘이 너무도 잘 알던 그런 곳에서 선한 것이 날 수 있다는 것과 자신이 어려서부터 대망하던 메시야가 그런 곳에서 나오셨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현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전도하는 빌립에게 단호하게 한마디 하였습니다.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요한복음 1장 46절 나다나엘의 단호한 한마디에 빌립 역시 항변하여 설명할 경험과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와보라”는 대답으로 친구의 의심 섞인 트집에 침묵으로 대신하고 예수님께 이끌고 나온 것입니다. 나다나엘은 친구 빌립의 권면에 의심스러움이 가득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그를 따라 나섰고 멀리에서 계신 예수님을 보게 되었습니다. 나다나엘은 나사렛의 생태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유대교 경전을 함께 공부하며 메시아를 대망하던 빌립이 말하는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나사렛 예수니라” 라는 말은 터무니없는 거짓말로 들렸을 것입니다. 그의 또 다른 성정으로도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을 보고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요한복음 1장 47절부터 48절 나다나엘은 당시의 위선자들과 같이 길거리에서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기도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며 자신의 신앙생활을 들어내지 않고 조용히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은밀하게 하나님을 경외하며 혼자 진실하게 기도하던 참 이스라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나다나엘을 보시고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요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사실 하나는 “참 이스라엘” 이라는 단어에 있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단어는 야곱이 얍복강에서 하나님과 씨름 하였던 밤에 환도뼈가 부러지면서까지 끈질기게 영적인 기도로 승리하면서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과 싸워 승리했다.”는 뜻을 가진 이름으로 개명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에게 “참 이스라엘” 이라는 칭호를 쓰신 뜻은 하나님의 권위 아래 살고 있으며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있는 진실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성정이 있던 나다나엘은 예수님께서 깊은 통찰력으로 자신을 보시고 다 아신다고 말씀하셨을 때,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두렵고 떨림의 질문을 하게 됩니다. 이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다시금 말씀하셨습니다.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 라고 더욱 놀라운 말씀으로 나다나엘의 영혼의 울림으로 격려를 해 주셨습니다. 나다나엘은 자신이 늘 기도하던 영적인 대상이 자신의 눈앞에 있다는 사실에 감격해서 영혼으로 고백을 하게 됩니다.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요한복음1장 49절 나다나엘은 예수님 앞으로 나오기 전에 예수님의 눈에 미치지 못하는 먼 곳에서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 혼자서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서 이스라엘의 구원에 대해 생각하며 진심으로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런 그를 공개적으로 공표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을 느낀 것이며, 예수님 안에 계신 신성에 엎드려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나다나엘에게 무화과나무 아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오실 메시아를 대망하며 기도하던 장소이자 기다림의 장소였습니다. 모든 유혹을 이기고 혼자 수행을 하면서 기도하던 그는 친한 빌립이 세례요한의 가르침을 쫓아 광야로 나가는 것을 보았을 것이고 많은 유대인들이 랍비들의 가르침에 삼삼오오 자신들의 신앙적 학문이 옳다고 주장하며 편가르기를 할 때, 쓸쓸히 혼자 기도하며 깊은 영적생활로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며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의 기다림은 개인적인 기다림이 아니라 민족적이며 전 인류적인 기다림으로 이스라엘 역사의 숙원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세상에 오신 그 메시아가 무화과나무 아래서 하나님의 나라를 묵상하며 그 메시아의 오심을 대망하던 나다나엘을 보고 아셨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다나엘과 육신적으로 만난 것이 아니라 이미 무화과나무 아래서 만났다는 것은 영적인 교통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다나엘은 자기의 정직성과 신앙심을 꿰뚫어 보시고 자신이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기도하던 내용 기도하는 방법 그리고 그곳에서 있었던 일들을 이미 다 아신다고 하시는 예수님 앞에서 영혼이 동요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직 모든 것을 공개하지 않으시고 나다나엘의 신앙고백에 전적으로 순종할 것을 말씀으로 명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1장 50절, 51절 예수님께 신앙을 고백한 나다나엘에게 예수님께서는 이제 이후로 자기 자신으로 말미암아 전개될 일들과 나다나엘이 앞으로 체험하게 될 “이 보다 더 큰 일들”을 펼쳐 보이시려고 하셨습니다. 이제부터 시작되는 예수님의 그리스도로서의 공생애가 그 의미였고 그리스도께서 공생에 사역을 통한 가르치심과 기적들 그리고 세상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 십자가에서의 헌신, 최종목적의 부활, 승천 이 모든 것이 바로 “이 보다 더 큰 일들”이며 그 큰 일들로 말미암아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로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나다나엘에게 “참 이스라엘” 이라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그의 꿈을 성취시키시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이는 야곱이 벧엘 광야 꿈속에서 하나님께서는 그 옆에 서 계시고 사다리가 하늘에서 땅까지 내려지고 천사들이 이 세상에서 사역한 보고서를 가지고 하늘나라로 올라가는 것과 그 보고를 마치고 다시 하늘나라의 임무를 가지고 땅으로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그 오래전에 야곱의 꿈과 그 환상 속에서 암시되었던 모든 것들을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기도 가운데 보고 싶어 했던 것들과 알고 싶어 했던 그 모든 신비한 일들을 실현되는 것들을 보게 될 것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역하신 공생애를 마치시고 십자가에서의 고난과 죽으신 후 여러 차례 말씀하신 부활의 몸으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고 첫 번째 함께 하지 못한 도마와 제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내시고 세 번째 일곱 제자들에게 나타나실 때. 디베랴 호수에서 예수님을 본 제자 중 한사람이 나다나엘입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은 이러하니라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요한복음 21장 1절부터 2절 예수님의 부활을 세 번이나 목격한 나다나엘은 자신이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기도하며 대망하던 메시아가 힘과 권력의 왕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을 죄에서 멀리하게 하시고 회개시키시는 사랑의 하나님을 보았던 것입니다. 역사가 요세비우스에 의하면 나다나엘은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 강림의 사건이 있은 후, 곧바로 고국을 떠나 멀리 동 인도 섬에 가서 각처를 떠돌며 복음을 전파하며 예수님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당시 사회의 문제점을 제기하고 회개할 것을 외쳤으며 그 반응은 교회의 부흥으로 이었졌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를 시기하고 질투하던 이교 사제들의 증오를 사게 되었고 푸릴미오의 대를 이어 그 형 아스티아제스가 왕위에 오르자 이교 사제들은 나다나엘이 혁명과 선동을 꾸민다고 모함하여 전신의 가죽을 산채로 벗겨내고, 죽은 시체는 십자가에 못 박고 머리는 칼로 베어 당시 기독교인들에게 보여줌으로서 공포정치로 두려움에 교회를 말살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찢기고 상한 나다나엘의 육체는 알바노 시에 매장되었다가 후에 메소포타미아의 다라지방으로 옮겨졌으며, 6세기에 이르러서는 시칠리아 섬 근처 리파리 섬을 거쳐 839년 사라센 인들의 침략을 피해 이탈리아의 베네벤토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이후 983년 로마로 운반되어 오늘날에는 티베르강 가운데 있는 한 섬에 건축된 성 바르톨로메오(카톨릭명) 성당에 마련된 아름답고 고운 홍대리석 영구 속에서 안식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 오피니언
    • 연재
    2023-04-20
  • 성경인물 시리즈 《도마》
    성경인물 시리즈 예수님의 12제자 중 《도마》 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달리시던 밤, 제자들은 유대인들의 박해가 예수님을 따르던 자신들에게도 미칠까 염려되어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부활하신다고 누누이 말씀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상기하며 서로를 격려하고 앞으로의 일들을 회의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던 중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굳게 잠겨있는 문을 그대로 통과하여 그들에게 찾아오셔서 놀라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라고 말씀하시며 그들에게 상흔이 있는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셨습니다.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요한복음 20장 19절부터 21절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고난 받으시던 그 모습 그대로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찾아오셨고 그것은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이심을 부정할 수 없는 부활의 진실성을 말해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손바닥과 옆구리의 상처 자국을 눈으로 확인한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다는 확신이 생겼고 절망과 좌절로 낙심해 있던 제자들에게 큰 기쁨이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오늘의 주인공 도마는 그 자리에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불참의 이유는 차치하고 그 자리에 없던 도마는 다른 제자들이 부활의 주님을 만난 기쁨과 절망에서 희망으로 바뀌는 반전을 몰랐던 것입니다. 부활의 예수님께서는 메시아로서의 능력을 친히 보여주셨고 당시의 고난이 부활의 과정에서는 비교할 수 없는 기쁨임을 제자들은 실감했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다시 전도 생활을 시작했고 도마를 만나 기쁨으로 그들에게 있었던 사건들을 얘기해 주면서 특별히 예수님께서 친히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심으로 그들을 만족하게 해 주셨다는 사실을 말했습니다. 제자들은 같이 주님을 보지 못한 도마에게도 감격과 기쁨을 나누어 주기 위해 자신들이 경험한 일들을 들려주었습니다. 그러나 도마는 제자들의 말을 구체적인 증거 없이 믿지 못하겠다는 말만 되풀이 한 듯 합니다.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요한복음 20장 24절부터 25절 도마는 모든 일을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판단하는 실증적인 사람이었기에 그가 부활의 주님을 믿고 온전하게 복음을 전하게 된 것은 그의 인생에 엄청난 반전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도마의 성격에서 짐작하듯이 그가 어떻게 예수님을 만나서 제자가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만 성경에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디디무스(δίδυμος/Didymus, '디두모') 그리스어로 쌍둥이라는 의미입니다. 공관복음에서는 빌립과 마찬가지로 열두제자의 명단에만 기록이 되어 있지만 요한복음의 경우에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기 전 두 가지의 사건에서 그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1장 1절 이하의 내용에서 요단강 저편 베다니의 나사로가 병들어 죽게 되었다는 전갈을 받았습니다. 이 소식에 유대로 올라가실 결심을 하신 예수님께 제자들은 예수님의 설교에 감동을 받아 사회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었음을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또한 유대교 유력인사들이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태도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죽은 나사로에게 가는 것을 반대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감수하고서 라도 유대로 올라가자고 하시는 예수님의 확고한 신념에 도마는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라고 다른 제자들을 독려했습니다. 『디두모라고도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요한복음 11장 16절 『어떤 병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자매 마르다의 마을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닦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버니더라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이르시되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제자들이 이르되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하더라 예수는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 그들은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생각하는지라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시니 디두모라고도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요한복음 11장 1절부터 16절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말했을 정도로 도마는 예수님과 고난을 받으려는 기백과 열정을 가지고 있었던 제자입니다. 예수님을 존경하고 자신의 스승으로 모시면서 일당백의 결사적인 자세와 충성스러운 모습으로 정직하게 예수님의 가르침에 순종했고 다른 제자들보다 앞장서는 용기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향하는 길 앞에서 제자들과 작별인사를 하시고 하늘의 아버지께 돌아가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걱정과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하늘 아버지께로 돌아가면 제자들과 모든 믿는 사람들을 위해 하늘을 처소를 예배해 두겠다는 말씀으로 위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때가 되면 다시 와서 그들을 영접할 것을 말씀하시면서 “내가 가는 곳에 이르는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요한복음 14장 1절부터 4절 이때 도마가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요한복음 14장 5절 도마가 예수님께 하는 질문은 솔직함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를 설명하면, 저 세상이나 그 처소로 가는 길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라는 것으로 영적인 신비에 대한 것을 다 아는 것 인냥 잘난 체 하지 않고 자신의 믿음이 다른 제자들보다 좋다고 자랑도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기준으로 그는 없는 것은 없다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할 수 있는 그렇지만 자신의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간절히 알고 싶어 하는 진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도마의 질문에 명확한 한 말씀으로 현대에 사는 우리에게도 진리가 되는 말씀을 하시게 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요한복음 14장 6절부터 7절 이런 성격의 도마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는 다른 제자들의 증언을 믿지 못하는 것은, 그의 냉소적인 불신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알고 싶어 하는 진실을 목격하고, 예수님의 상처를 자신의 눈으로 확신함으로써,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 따르고자 했던 스승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분명하게 믿고 싶은 간절한 믿음에서 나오는 의심이었던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현현이 불안한 자신의 심정에서 허망한 사건이 아닌 사실이기를 바라는 죽음을 각오한 심정에서의 고백이었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도마에게 나타내 보이실 때, 그날도 “안식 후 첫날” 일요일 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이 날에 나타나셨습니다. 맨 처음 막달라 마리아에게도, 엠마오로 가는 두 사람에게도, 열명의 제자들에게도, 베드로에게도, 모두 이날에 나타나 보이셨고, 열 제자들에게 나타내신 후 여드레를 지난 이 날에 도마도 있을 때에 특별히 그를 위해서 다시 제자들 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도마에게 다시 나타나신 것은 특별히 열정적인 도마의 확신을 위한 의심에 종지부를 찍어주시고 싶으셨던 마음이셨을 것입니다. 도마는 예수님의 부활을 보지 못하고 기쁨이 충만해 있는 다른 제자들에게 들었던 부활의 소식은 자신을 의기소침하게 만들었을 것이며 매우 우울하고 도태된 기분으로 지냈을 것입니다. 스승님 이셨던 예수님을 만나고 싶고 믿고 싶어 방황하며 의심하던 도마에게 예수님께서는 다시 찾아오셔서 도마의 의심을 책망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네가 그렇게 하고 싶은 대로 해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요한복음 20장 27절 예수님께서는 언제까지 불신의 벽에 부딪쳐 할 일도 못하는 도마에게 그의 의심과 호기심을 최대한 만족시켜주셨습니다. 도마에게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셨다가 다시 사신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명백하게 증거해 주시고 손과 옆구리의 상흔은 보여주시고 도마로 하여금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라고 고백하게 만들었습니다.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요한복음 20장 28절 이러한 도마의 고백은 기독교 내에서 예수님을 설명하는 가장 완벽한 신앙고백이라고도 합니다. 예수님께 육성으로 직접 하나님이라고 고백한 유일한 제자가 도마이며 “주는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라고 고백했던 베드로 보다 더 높은 평가를 합니다. 거짓과 형식에 철저했던 유대인들에게는 “요나의 표적 밖에 보여줄 것이 없다고”고 거절하신 예수님께서 진실하고 정직한 심정에 거룩한 의심을 품었던 도마에게는 위대한 진리를 알게 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거룩한 신앙고백을 했던 도마를 향해 진리의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요한복음 20장 29절 어거스틴(Sanctus Aurelius Augustinus, 354년 11월 13일 ~ 430년 8월 28일)에 의하면 ‘도마가 의심했기 때문에 후대의 우리는 의심 없이 믿을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즉 도마가 의심함으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내셨고, 그처럼 의심하며 믿기에 느리고 더디었던 제자가 된 것을 보고 우리는 유력한 증거를 얻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도마의 순교는 서기 52년 인도에서도 남쪽 끝 부분인 케랄라 주에까지 가서 선교하다가 순교했다는 전승이 있으며 인도의 첸나이에는 '도마의 언덕'이라고 하여 첸나이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도마가 순교한 장소인 동시에 그의 무덤이 안장된 성 토마스(카톨릭 명) 대성당이 있습니다.
    • 오피니언
    • 연재
    2023-04-18
  • 성경인물 시리즈 《요한》
    성경인물 시리즈 예수님의 12제자 중 《요한》 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가장 연소자로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 라고 표현하며 요한복음과 요한1서, 요한2서, 요한3서와 요한계시록의 저자입니다. 이를 증거할 성경구절은 요한복음서를 통한 요한 자신이 예수님의 활동과 영광의 목격자라는 것(요1:14, 요19:35, 요21:24)과 복음서 내용에서도 목격자로서의 기억들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복음서 전체를 통한 자신을 거명할 때에도 요한이라는 이름 대신 “그의 사랑하시는 자” 혹은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 등의 명칭을 사용함으로 요한복음서의 저자가 자신임을 알리고 있습니다(요13:23, 요19:26, 요20:2-10 요21:7).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가리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는 말에 메시아를 만난 기쁨을 표현했던 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은 “안드레” 라고 밝히면서 다른 한사람은 “다른 제자”라고 표현했던 것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드레와 함께 자신을 쫓아오는 요한에게 동일한 질문으로“무엇을 구하느냐?”라고 물으시면서 안드레의 “랍비여 어디계시오니까?”라는 대답에 그저 생각에 잠겨 있던 요한에게 “와보라” 라는 두 번째 말씀으로 요한이 생각하고 있는 것들의 실현 가능함을 밝혀주시겠다 확언의 말씀을 하십니다. 요한은 안드레와 같이 세례요한의 제자로서 그를 동조하며 자신과 세상의 죄에 대한 깊은 성찰을 하던 사람이었으며 그 죄를 회개하여 세례를 받고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회복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기대를 품고 이스라엘을 다시 회복 시켜주실 구속자를 기다리던 자신의 신념이나 신앙에는 결단력이 있지만 겸손하고 과묵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유대교적 삶의 의문이 많았던 요한에게 “와보라” 라는 예수님 말씀은 그의 스승 세례요한의 “하나님의 어린양” 이라고 칭하신 분을 따르기에 충분한 조건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에게는 예수님께서 별명으로 지어주신 “보아너게(우뢰의 아들)”라고 불리울 만큼 다혈질적인 성격도 있었습니다. 그의 다혈질적임은 예수님을 따르지 않은 사람이 귀신을 쫓아낸다고 하는 것을 금하게 하려하는 배타적인 성격이나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는 사마리아인들에게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쫓아내려 저희를 멸하게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라는 말로 저주를 하는 것을 책망하며 내리신 별명이었습니다. 그의 성격은 후에 이어질 사건들로 인해서 깨달음으로 이어지게 되었고 인내를 요하는 복음서와 계시록을 비롯한 예수님을 증거 하는 서신을 기록하는 끈기 있는 성격으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초대교회 목회를 하던 요한은 예수님의 사랑을 본 받아 “사랑”이라는 단어를 중심으로 요한서신을 기록하게 되었던 것이며 죽는 순간까지 ‘사랑하자’라는 말을 쉬지 않았다고 전해집니다. 요한의 성격에서 “와보라”라고 하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가 평소에 갈망하던 무엇인가 볼 수 없는 것을 보려고, 찾을 수 없는 것을 찾으며, 들을 수 없는 것을 들으려고 추구하며, 만져볼 수 없는 것을 만져보려고 찾는 그의 내적 요구와 소원들을 성취 할 수 있는 기회로 들렸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즉시 예수님을 따라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가르침에 집중하고 깊은 성찰을 통해서 그의 기록서에 그날의 기억들을 남겨놓았던 것입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요한1 1:1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1:14 요한은 세베대와 살로매의 아들이며 그의 형제 야고보와 함께 갈릴리 바다의 어부였습니다. 당시 삶은 비교적 부유한 선주의 집안에서 자라온 것으로 추정이 되는데 그는 자신의 어선을 소유하고 있었고, 직원들을 고용하여 어업에 종사하고 있었으며, 그의 어머니 살로매는 아들의 스승이신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며 봉사했던 것으로 보아 중산층 이상의 생활환경이었을 것입니다. 또한 제자들 중 부한 형편에 속하는 것을 암시하는 내용으로 그의 어머니 살로매는 예수님께 메시아의 왕국이 왔을 때 요한과 야고보에게 좋은 위치의 권세와 자리를 청탁하는 것으로도 증명이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가 안드레와 베드로 형제보다 부유했다는 증거는 복음서 말미에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고 실의에 빠져 있을 때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가 거주하게 했다는 것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고통가운데 마지막 사역을 하실 때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안위를 부탁하심에 요한은 자신의 집으로 모시고 갔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요19:25-27 또한 요한이 당시의 권력과 부유층이라고 할 수 있는 제사장과도 친분이 두터웠던 것으로 그의 신분이 평민 이상이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한 사람이 예수를 따르니 이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 예수와 함께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가고』 요18:15 그런 그에게 갈릴리에서 온 촌스러운 청년모습의 예수님은 요한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하나님 나라를 위해 바칠 것을 명하시고 그에게 인간적인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차원의 사업을 하시자고 말씀하셨고 요한은 즉시 그 말씀에 순종하여 따르게 됩니다.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그들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곧 부르시니 그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막1:20 이 부분에서 요한의 믿음과 성격이 잘 드러나고 있는데, 마치 아브람에게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신 것과 유사한 것으로 인간의 입장에 보면 경제적인 것과 자신의 삶의 정도 그리고 부모를 떠나야 한다는 고통이었을 것이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초석이었습니다. 요한에게 있어서 이것은 영원한 것을 받기 위한 희생이었고 영적인 삶을 위해 키와 불로 태워질 쭉정이를 거르는 결단이었습니다. 가장 어린 나이에 다른 제자들 보다 더 많은 것을 포기한 요한은 예수님의 사역을 가장 근거리에서 경험하면서 가르치시는 말씀을 숙고하고 행하시는 기적들을 경험하며 다른 제자들과 함께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악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받아서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전파하며 병든 자를 고치는 일에 동참했습니다. 누구보다 요한을 잘 아시던 예수님께서는 그의 치밀한 성격과 겸손을 인정하시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함께 특별히 아끼시던 제자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적인 사역마다 요한을 입회시켜 특별한 사건들의 목격자가 되게 하시고 요한에게 믿음을 더하게 하셨습니다. 이는 그들이 복음을 위해서 특별한 사역에 동참될 것이기에 또한 특별한 희생과 훈련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죽은 야이로의 딸을 다시 살리셨을 때에도 높은 산에서 예수님의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지는 영광스로운 변형이 있을 때에도 십자가에 못 박하시기 전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시며 기도하실 때에도 요한은 빠트리지 않고 데리고 가셨습니다. 이러한 사건들을 통해서 요한은 영원한 생명이신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셔서 “달리다굼” 이라는 단지 말씀 한마디로 야이로의 딸을 살리시는 것을 보면서 말씀이 생명이 된다는 사실과 그 생명이 육신이 되셨다는 사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이 될 수 있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또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형하신 예수님을 경험한 요한은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죄에서 자유한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며, 이런 모든 것이 피와 땀을 흘리는 기도의 과정에서 일어 날 수 있는 방법을 깨닫고 실천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다른 제자들 보다 많은 것을 보았고 느꼈고 실천했을 것입니다. 그가 기록한 요한복음서에 기록된 독특한 기록들 중에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는 물로 포도주를 변하게 하신 예수님에게서 창조주의 모습을,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삼십 팔년 된 병자를 고치셨을 때에는 은혜와 자애의 하나님의 모습을,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에게는 인류의 죄를 친히 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시는 속죄의 예수님의 모습을, 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명을 먹이셨을 때에는 만물의 창조주로 하늘에게 내려온 살아있는 생명의 떡이 되시는 하나님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살을 먹고 그의 피를 마시는 자에게 영생을 주는 참된 영혼의 양식, 참된 음료이신 생명의 주심을 깨닫고 영생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을 보았을 것이며, 소경의 눈을 뜨게 하는 사건에서는 죄악의 어두운 세상의 빛으로 오신 그리스이심을 보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 중에서 특히 더 중요한 사건으로는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무덤에서 부르셔서 살리신 사건에서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께서 장차 세상 끝 날에 다시 오셔서 믿음 안에서 잠든 자들에게 “무덤에서 나오라”라는 부르심으로 심판의 주인이시며 영생의 주인이신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보아너게’ 라는 극단적이고 우레와 같은 성격의 소유자가 사랑의 사도를 변하게 된 많은 사건들도 있었을 것이나 짐작하건데 그의 영적인 삶의 기초를 마련한 것은 예수님께서 잡하시기 전날 밤에 베드로와 함께 다락방에서 유월절 준비를 하며 최후의 만찬을 나누며 그 자리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인상 깊게 지켜보면서 사랑에 대한 영감으로 가득 차 있었을 것입니다.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여』 요13:4-5 요한은 영적인 충만함으로 예수님의 고별 설교를 듣고 그 감동이 가시지도 않은 상태에서 많은 체험을 하게 됩니다. 그가 하루 동안에 경험한 영적인 체험은 예수님의 사랑에 감동하여 찬미하며 감람산으로 나아갔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고민하며 사명을 위해 기도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면서 그 밤을 지새우고, 다음날 새벽 체포되어 가시는 주님의 뒤를 따라가서 대제사장에게 심문을 받으시는 예수님을 지켜보며 자신의 스승이 모진 고난을 받으시는 것을 보면 자신의 무능과 좌절을 느꼈을 것이며, 거기에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절망과 회한으로 패배자가 된 베드로를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가서 은거하게 하는 사건들은 요한에게 있어서 복음을 전하는 방법에 대한 고뇌가 있었을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못 박히시고 피흘리시는 예수님을 가까이에서 바라보면서 고통가운데 어머니 마리아의 안위를 걱정하시는 예수님의 부탁으로 자신의 집으로 모시고 갔습니다. 그리고 부활의 새벽에, 요한은 무덤이 비어 있다는 막달라 마리아가 외치는 소리를 듣고 베드로와 함께 급히 달려가 텅빈 무덤 속으로 들어가서 예수님의 몸에 싸여져 있던 세마포와 머리에 쌌던 수건만 개어져서 놓여 있을 뿐 예수님은 그곳에 계시지 않는 것을 목격하고, 예수님께서 생전에 말씀하신대로 다시 살아나셨음을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무덤으로 갈새 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려가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 구부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 시몬 베드로는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 있더라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요20:1-8 요한은 다른 제자들과 함께 부활하신 예수님의 음성을 두 번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다시 나타나시기를 더디 하시는 예수님을 기다리지 못하고 다시 갈릴리 바닷가로 고기를 잡으러 가게 됩니다. 고기를 잡지 못하고 돌아오는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고 말씀하셨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채 그물을 던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요한에 예수님을 제일 먼저 알아보고 예수님이라고 알리게 되었을 때 베드로는 겉옷을 두르고 바다에 뛰어내리는 사건도 있었습니다. 그날 요한과 베드로를 비롯한 어부로 종사하던 제자들은 함께 그물을 올려 153마리의 물고기를 수확하고 예수님과 함께 조반을 먹은 후에 베드로에게 예수님의 양을 먹일 사명을 맡기셨고 베드로의 순교에 대한 예고도 하셨습니다. 이때 베드로의 질문은 요한의 사역에 대한 것이었고 이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올 때 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르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질문과 대답으로 인간적인 베드로의 숨겨진 성격도 나오고 있다고 생각을 하는데 가장 연장자 베드로와 가장 연소자 요한의 관계에서 어린 동생을 챙기고 싶었던 베드로의 측은지심과 사명이 다름은 오직 하나님의 섭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씀대로 요한과 베드로는 전혀 다른 차원의 목회를 하게 됩니다. 이는 그들의 성격에서도 나타나는 것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바다로 뛰어내린 베드로는 그의 열정적인 성격에 맞게 열렬하게 전도생활을 하다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도 조용히 배에 남아서 그물을 끌어올렸고 가장 연소자 제자로서 조용하게 영적서신 위주의 집필과 오랜 동안 전도와 목회를 하면서 조용하게 자연사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어머니 마리아의 안위를 맡기시면서 그의 심령을 정화시켜 육적인 삶에서 영적인 삶으로의 전환하는 방법을 깨닫게 하시고 영안을 열어 주심으로 요한을 사용하셔서 예수님에 대한 가장 오묘하고 진리의 영적 사실을 설명하도록 복음서를 기록하게 하셨으며 또한 은혜와 영광과 역사의 통치 가운데 계시는 예수님을 공개하는 계시록을 기록하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 계 1:1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 요한은 베드로와 함께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으면서 “예루살렘교회의 기둥”으로 활동하였습니다. 『또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갈2:9 요한은 마지막을 에베소에서 목회하며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 많은 핍박을 견디다가, A.D.81-96 로마의 도미티아누스 황제 때 밧모섬으로 유배를 당했고, 그 후에도 A.D. 98-111트라얀 황제 때까지 살았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의 사역 이후 초대교회에서 가장 유명했던 목회자이자 교부였던 폴리캅도 그의 직계 제자였으며 그 역시 A.D.155에 순교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고 3년간 제자로서 가르침을 받고 “공교히 만든 이야기”(벧후1:16) 가 아니라 그가 “친히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여 손으로 만진 바”(요일1:1)를 그의 복음서에 기록했던 것이며 그것을 토대로 요한이 깨달은 깨달음을 그의 서신에 기록했던 것입니다. 요한은 다른 제자들 보다 많은 것을 보았고 깨달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마음과 인격과 품성과 사명을 보다 더 깊이, 보다 더 높이, 가장 많이 이해했던 제자였습니다. 그는 그의 성격대로 더 많은 것을 보기 원했고 만지기 원했고 깨닫기를 원했기에 불가시적인 것을 볼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요한의 복음서는 다른 복음서와는 다르게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행하시고, 활동하신 외면적인 것을 나열하여 기록한데 비해 외면적 사실도 영적인 시각에서 기록하면서 내면적인 사실에 입각한 복음을 기록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복음서에는 “말씀이 육신이 되신” 인간으로서 계시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능력 그리고 생명과 빛이 충만함에 있었던 것입니다. “와보라”고 요한에게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보여주셨고 요한은 모든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가 본 것을 다 증언하였느니라』 계1:1-2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1:1-14 요한은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확신을 가지고 증거 하였고 요한의 깨달음에 예수님께서 계시하시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이었고 그에게 있어서 증거의 사명은 최대의 사명이요 영광이며 최대의 기쁨이었을 것입니다. “와보라” 요한에게 하셨던 권면은 오늘날에도 이어지는 권면으로써 그 말씀 안에는 육안으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것들을 보게 될 것이며, 육신의 귀로는 절대 들을 수 없는 것을 듣게 될 것이며, 불가능한 것을 직접 느낄 것이며, 신령한 하늘의 일을 감지하며 “임마누엘”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될 것이라는 영적인 부르심인 것입니다.
    • 오피니언
    • 연재
    2023-04-14
  • 성경인물 시리즈 《베드로》
    성경인물 시리즈 예수님의 12제자 중 《베드로》 입니다. 신약성경 전체에서 바울과 더불어 인간의 내면과 갈등 그리고 다채로운 인격을 보여주는 인물은 예수님의 12제자 중 가장 애제자라고 할 수 있는 베드로일 것입니다. 특히 복음서의 내용에서 그의 특징과 개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요나 또는 요한의 아들로서 갈릴레아 지방 벳새다 동리 출신입니다(요1:44). 예수님의 12제자 중 안드레와는 형제지간이며 원래 이름은 바요나 시몬(마16:19)이었으나 예수님께서 그에게 반석이라는 뜻의 아람어 케파(כיפא, kefa = 게바(요1:42)라는 새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이를 소리 나는 대로 고대 그리스어 Κηφας(kephas)로 적고, 낱말 뜻을 고대 그리스어 페트로스(돌, 석石)로 풀이한 것입니다. 그의 직업은 안드레 동생과 함께 세베대의 아들이며 형제였던 야고보와 요한과 같이 어부였으며 아마도 아버지의 대로부터 가업으로써 종사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 이미 아내가 있었습니다.(막1:29,31) 그는 제자들 사이에서 연장자였을 것입니다. 당시의 사회는 조혼을 하는 관습이 있었기 때문에 그가 일찍 결혼한 것으로 짐작이 되며 그에 앞서 그가 제자들 사이에서 항상 지도자로 지위를 차지하고 있던 것을 보면, 당시의 유대인은 젊은 사람을 지도자로 삼는 경우가 극히 드물었다는 역사적 통계로 그는 상당히 연장자였을 것입니다. 그들 형제가 자기의 고기잡이 배를 소유하고 예수님을 제자들과 함께 초대할 수 있을만한 집에서 살고 있었다는 것을 추론하면, 그의 삶의 정도는 중류층 이하 정도의 생활 형편이었을 것이며 베드로가 받은 교육의 정도는 사도행전 4장 13절에 ‘학문 없는 범인’이라고 불리우고 있으나, 그렇다고 베드로가 완전한 문맹이었다고 보기 어려운 증거들이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은 초등 교육을 회당에서 받았는데, 상당히 보급화 되어 있었던 사실이 역사적으로 증명되고 있으며 베드로의 후년에 소아시아 교회에 보낸 서신을 보더라고 다소의 교육은 있었을 것을 추정됩니다. 따라서 사도행전에 기록된 ‘학문 없는 범인’을 재해석하면 ‘신학적 지식이 없는 평신도’ 라든가 ‘고위 학문을 배우지 못한 평민’이라는 정도의 의미로 받아들이는 편이 정확할 것입니다. 베드로가 처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것은 요한이 세례를 주던 요단 강 건저 저편 베다니였습니다(요 1:28). 베드로는 항상 언행이 다른 제자들 보다 먼저였는데 예수님께 가까이 가기 위해 바다 위를 걸어가려던 행동이나 변화산에서 초막 셋을 짓겠다고 제한한 것도 그렇고 예수님의 수난 소식에 주를 결코 버리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한 것도 베드로 였습니다. 또한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사장 종의 귀를 칼로 벤 것도, 대제사장의 집 뜰에 재판 광경을 보러 간 것도, 예수님이 부활 후 디베랴 바다에 나타나셨을 때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르고 바다로 뛰어내린 사람도 베드로였습니다. 베드로를 언급하는 일화와 그의 사역에 대한 핵심적인 사건 중 마태복음 4장 20절에서 그는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적극적으로 따르는 순종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마태복음 16장 16절에서는 예수님께서 너희는 나를 누구로 생각하느냐? 라는 질문에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라고 12제자 중 제일 먼저 예수님을 그리스도 메시아로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마가복음 8장 31절 이하에서는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것을 드러내 놓으시고 말씀하시자 베드로는 예수님께 항변하여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는 사탄” 이라는 꾸짖음을 듣기도 했습니다. 또한 마가복음 14장 30절 이하에서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 라고 말씀하시자 베드로는 “저는 주를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대답하였지만 결국 예수님께서 체포되시자 부인하며 도망가 버리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마가복음 14장 72절 이하에서 베드로는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한 일이 떠올라서 울었다는 표현을 증거로 그는 심히 괴로워하며 눈물 속에서 간절히 회개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21장에서는 베드로가 다시 예수님의 사랑하는 제자로서 다시금 사명자의 자리로 포함시키는 것입니다. 특별히 사도행전에서는 베드로가 그 누구보다 거듭난 12명의 제자들 가운데 리더로서 당당히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며 초기 예루살렘 교회의 구축과 선교사역을 성령충만함으로 성실하게 감당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3장 이하에서는 베드로는 예수님의 복음을 토대로 기적을 행하고 성령 충만한 교회의 지도자로서 예수님을 부인한 다른 사람들을 고발하는 위치에 서게 됩니다. 베드로 전서와 후서에서는 베드로의 권위와 위상을 부각시키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증거하는 증인으로서의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를 때로는 ‘목자’로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니라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 』 벧전 5:1-4 ‘예수님의 전통을 목도한 진정한 증인’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교묘히 만든 이야기를 따른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그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이 소리는 우리가 그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부터 난 것을 들은 것이라』 벧후 1:16-18 ‘전통 기독교 신앙의 수호자요 거짓 예언자들의 비판자로’ 『그러나 백성 가운데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그들은 멸망하게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벧후 2:1 ‘바울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아 주는 권위 있는 교계의 원로로’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2)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벧후 3:14-16 그려지고 있습니다. 성경의 흐름 속에서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순종의 모습과 고난당하시는 예수님을 부인하며 내적갈등을 표출하는 모습 그리고 다시 한 번 예수님의 사랑하는 제자로서 그의 위치가 회복되며 예루살렘 교회 내에서 강성한 리더쉽이 부여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누구보다도 신앙의 길을 걸어가며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 속에 참여하는 오늘날 우리들에게 많은 교훈을 제공하는 인물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지상사역을 옆에서 직접 목격하고 제자의 길을 따르던 베드로는 복음에 대한 역사적 증인이었습니다. 역사적 베드로는 ‘살아서 남아 있는 음성’, 곧 예수 그리스도를 옆에서 직접 목격한 목격자의 생생히 살아있는 기억이라는 입지에서부터 발생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사도행전 10장 42절에서 “증언하게 하셨다.”라고 말하며 예수님의 생애를 증언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하심으로 베드로 역시 스스로 예수님 사역의 목격자로 자격을 부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혹자는 베드로가 기도중이나 이야기 중에 예수님을 회상하며 하는 말과 가르침들을 마가가 듣고 기록했다고 하는 문서를 베드로의 예수 회상록(apomnemoneumata)이라고도 합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논리로서 베드로가 목격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은 구태의연한 부연설명이 없고 사건의 특징들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간결한 핵심만 집어서 설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마가가 기록한 베드로의 예수 회상록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역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문서로써 당시 수일내로 다시 오실 줄 알았던 예수님의 재림이 늦어지는 상황에서 초기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가르침의 문서로 활용되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기록된 베드로의 예수 회상록을 중심으로 마태와 누가가 예수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역을 기록하는데 활용하여 복음서를 기록함으로써 베드로의 예수증언의 전승들이 이어지게 되는 계기가 마련된 것입니다. 베드로의 예수 회상록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마가복음입니다. 참고적으로 설명을 드리자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내용의 약 80%가 마가복음의 내용입니다. 즉 마가복음을 토대로 두 복음서가 기록했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들 각자의 자료인 마태의 M자료와 누가의 L자료를 첨부시켜 각자의 복음서를 완성했던 것입니다. 마가복음에는 없고 마태와 누가복음에만 있는 자료는 독일어 Quelle의 약자 Q자료설 이라고 합니다.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와 그의 형제 안드레에게 주신 사명은 ‘사람을 낚는 어부’였습니다(마4:19-19; 막1:16-17). 그러나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게네사렛 호숫가에서 밤새도록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한 채 정박한 배에 타서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라고 권면하신 것을 이행한 결과 그물이 찢어질 만큼 잡히게 되었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예수님의 무릎 아래 엎드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회개하며 고백하게 됩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두려워 말라 이제부터 사람을 낚을 것이다.” 라는 말씀으로 그의 사명을 암시해 주십니다. 그 후 베드로는 동업자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예수님을 따르게 됩니다(눅5:1-11). 공관복음서와는 다르게 요한복음서에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나서 따르게 된 이유를 다르게 기록하고 있는데,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보고 전한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라는 말을 들은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따르던 중 베드로에게 전한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라고 전하게 되었습니다. 이 말을 전해들은 베드로가 예수님께 나오면서 게바(베드로)라는 별칭를 부여받으며 사명자가 되었습니다(요1:43-51). 제자로 부름을 받은 베드로는 예수님의 행적들을 목격하며 점차 열두 제자들 중에서 수제자의 자리를 차지하는 사건을 맞이하게 됩니다. 마태복음 16장 13절 이하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고 물으시며 자신에 대한 사람들의 의견을 묻게 됩니다. 이 질문에 제자들은 세례요한이라고 대답을 하기도 하고, 엘리야, 더러는 다른 예언자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등 여러 가지 표현의 대답을 하게 됩니다. 대답이 마쳐지고 이번에는 다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라는 물음에 시몬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중 수장으로서의 임명으로 베드로라는 별칭과 함께 교회의 반석이 되는 위엄과 천국열쇠를 부여하게 되었습니다. 복음서 전체에 있어서 베드로는 제자들 중 항상 첫 번째 위치에 있게 되는데 그와 비견할 제자는 세베대의 아들들인 야고보와 요한일 것입니다. 그들이 베드로와 동등한 위치에 있었다는 사실은 예수님께서 모세와 엘리야와 말씀을 나누시는 천국의 모습으로 변모하실 때 그들만 동행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변모하셨을 당시에도 베드로는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에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라고 말을 하는 것을 추정하면 세명 중에도 가장 신뢰하고 수장으로 인정받는 제자는 베드로였을 것입니다. 파란만장한 베드로의 행적 중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죽게 되자 낙심한 베드로는 도마와 나다나엘, 세베대의 아들들인 야고보과 요한 그리고 두 명의 다른 제자들과 함께 다시 디베랴 호수로 고기잡이를 하러 갑니다. 그들에게 밤은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하는 허망하고 고독한 밤이었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믿고 의지하던 주군의 죽음으로 낙심한 그들에게 다시 호수로 돌아오게 된 낙심 그리고 고기 한 마리도 잡지 못하는 낙심은 삶을 포기 하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나타났지만 알아보지 못하였고 그들은 예수님께서 가리키신 지점에 그물을 던져 들 수 없을 만큼의 고기를 잡은 후 비로서 예수님이신줄 알았습니다. 그때 잡은 고기가 모나미 볼펜으로 유명한 153마리의 기적, 153마리였습니다.
    • 오피니언
    • 연재
    2023-03-30
  • 성경인물 시리즈 《사도바울Ⅱ》
    사도바울이 가말리엘의 제자로서 예루살렘에 얼마나 머물었는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다녔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추정이 가능한 것은 그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했던 행동으로는 아마도 산헤드린 회원이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산헤드린이라는 소논문을 담고 있는 탈무드의 자료에 따르면, 대산헤드린은 71명의 현자들로 구성된 법정이었고 종교적 입법기관으로서 '법'은 이곳에서 나와 모든 이스라엘에 공표되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왕과 대제사장 임명, 전쟁선포, 예루살렘과 성전의 세력범위 확장 등을 명할 수 있었으며, 사법적으로는 대제사장, 거짓 예언자, 반역죄를 지은 원로, 잘못한 지파를 심판할 수 있었습니다. 대산헤드린은 66~70년 예루살렘에서 사라졌으나 후일 팔레스타인의 다른 지역에서 소집되었다고 전해집니다. 그가 산헤드린의 회원이었을 것이라는 추정은 산헤드린 회원에게 주어진 권한에 있습니다. 그들은 유대교에 반하는 모든 세력들을 정죄할 수 있는 투표권이 있었으며 스데반과 논쟁할 때, 그 자리에 사도바울도 있었을 것이며 그를 죽이는 데에도 찬성의 투표를 했을 것입니다.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이른 바 자유민들 즉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과 더불어 논쟁할새』 행6:8~9 전통적이며 율법적인 신앙으로 굳어져 있었고 바리새인이었던 바울에게 있어서 스데반을 위시한 그리스도인들은 “모세와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말을 하는 자들(행6:11)”이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못 박히신 예수님을 자신들이 기다리고 있는 유대민족을 독립시키고 다윗의 왕처럼 강한 힘으로 오실 그리스도라고 믿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죄였으며, 유대교에 대한 비판은 모세의 권위와 율법을 파괴하는 행위로서 모두 용서할 수 없는 범죄행위였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그리스도교에 대한 철저한 적개심을 갖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믿는 모든 사람들을 근절하고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가 어려서부터 배우고 익힌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고 도덕적으로는 결함이 없는 사람이었으나, 그리스도와 그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암적인 존재였습니다.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딤1:13 당시 사도바울의 유대교 신앙은 복음이라는 새로운 그리스도교를 전하고 십자가에 처참하게 돌아가신 예수님의 추종 세력을 대적하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이었으며 그런 자신의 행위가 신앙을 지키는 양심에 의하여 마땅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많은 일을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 예루살렘에서 이런 일을 행하여 대제사장들에게서 권한을 받아 가지고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찬성 투표를 하였고 또 모든 회당에서 여러 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고 그들에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에까지 가서 박해하였고』 행29:9~11 그의 이런 유대교 신앙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며 변론하는 스데반을 예루살렘 성 밖으로 끌어내어 돌로 쳐 죽일 때 당연한 것을 여겼습니다.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행7:58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행8:1 사도바울의 그리스도교를 믿는 제자들과 개종한 사람들에 대한 핍박은 스데반을 죽이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예루살렘을 비롯하여 예수님의 제자들이 선교사로 파송되어 전도하고 있는 주변국의 도시로 파급되었습니다. 『또 모든 회당에서 여러 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고 그들에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에까지 가서 박해하였고』 행26:11 사도바울은 그리스도교가 예수님의 제자들에 의한 선교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에 대한 극심한 적개심을 품고 그들을 멸하고자 하는 열정으로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여 그리스도교를 쫓은 사람을 만나면 남녀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고 다메섹으로 급하게 떠나게 됩니다.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행9:1-2 시리아의 수도 다메섹에는 많은 유대인들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그들 중에는 예수님의 생전에 가르침을 듣고 개종한 사람들도 있었으며, 오순절 날 예루살렘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러 온 사람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제자들에 의해서 전도되어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또한 스데반의 죽음으로 위축된 개종한 사람들이 핍박을 피하여 그곳으로 옮겨간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자신이 믿는 하나님께 대한 충성으로 가득 찬 바울은 다메섹에 가까이 도착하여 자신이 찾는 사람들을 잡아 옥에 가두고 심판할 생각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런 바울 앞에서 로마의 핍박을 피해 이주해 온 사람들은 풍전등화와 같이 언제 잡혀서 끌려갈지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바울은 살기가 가득한 상황이었고 그 성에 숨어있는 그리스도인들은 굶주린 늑대 앞에 선 어린양이었습니다. 그때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사울에게 비추었습니다.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행9:3 그 빛은 사도요한이 증거한 빛의 근원이 되는 하늘의 빛이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었습니다. 그 빛은 사울뿐만 아니라 사울과 함께 했던 일행까지도 알 수 있는 빛이었습니다. 『왕이여 정오가 되어 길에서 보니 하늘로부터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 비추는지라』 행26:13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어두움을 몰고 가는 바울에게 찾아오셔서 은혜롭게 빛을 발하시며 그에게 인자하신 말씀으로 거룩한 삶을 위한 사명으로 초대를 하십니다.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행9:6 예수님의 음성을 들은 바울을 땅에 엎드려 졌고, 예수님의 음성을 깨닫지 못했던, 처음 바울과 동행한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서 다메섹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다메섹에는 바울이 찾아서 죽이고자 했던 사람들 중 아나니아라는 예수님의 제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이르시되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사람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 행9:10-11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이르시되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사람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 그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을 결박할 권한을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았나이다 하거늘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행9:10-19 사도바울의 그리스도교를 믿는 사람들에 대한 핍박은 소문만으로도 아나니아 역시 알고 있었고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께서는 바울이 주님의 이름으로 고난을 받아야 할 것과 이방인과 당시 지배계층의 사람을 상대로 복음을 전하는 큰 사명을 감당하기 위한 그릇이었음을 자상하게 설명하시고 아나니아에게 안수하여 예수님의 계획을 말하게 하시고 성령이 임하는 것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성령이 임한 후 바울을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갈 목적이 생겼을 것입니다. 그에게 다메섹으로 오는 길은 종교적 열정과 소속된 인맥으로 인한 가시밭길 이었습니다. 그에게 보여지는 종교적 열정 외에 심경의 변화는 싫어도 할 수밖에 없는, 그것을 해야 자신의 삶의 공간과 자리에서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그런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미 스데반의 논리정연하고 죽음 앞에서 당당하게 외치는 설교에 놀랐고 스데반에게 돌을 던지는 사람들의 옷을 지키며 스데반이 죽음 앞에서 자신에게 돌을 던지는 기도소리를 들었던 것입니다. 그는 스데반의 죽음에 의해서 자신의 삶에 커다란 충격을 가져 왔지만 스스로 벗어 날 수 없는 환경이 있었기 때문에 결단을 내릴 수 없이 흐르는 시간에 자신을 맡겨 두었던 것입니다. 스데반의 순교는 사도바울이라는 기독교 역사에 큰 업적을 남긴 인물을 부르시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도바울을 마음을 아셨던 예수님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도 바울의 당시 심정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말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행26:14 이 광경은 사도바울이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자신이 만난 예수님을 증거 할 때,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하신 말씀을 인용해서 설명한 내용입니다. 이것은 사도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동안에 갖고 있는 그의 마음이었으며 이를 아셨던 예수님께서 그를 부르시면서 위로해주신 말씀인 것입니다. 이는 스데반 집사로 인해서 변화된 자신이 진정한 하나님을 반역하고 핍박한다는 것은 마치 가시돋힌 채찍을 뒷발질 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를 저항하며 하나님의 섭리를 거스리는 어리석은 일이며 악하고 고통스러운 행위였다는 것을 간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 스데반이 만난 예수님께서 직접 찾아오셔서 자신에게 사명을 주셨다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 새로운 생명의 시작이었으며 모든 것을 버리고 새롭게 시작하는 삶의 변화였습니다.
    • 오피니언
    • 연재
    2023-03-27
  • 성경인물 시리즈 《사도바울Ⅰ》
    하나님의 사랑을 독특하게 받았던 바울은 12제자를 포함한 어떤 제자들보다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기에 적합하게 훈련되고 경험되어진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유대교 율법에 관한 지식도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의 학식이었으며 그에 따르는 실천도 거짓이 없는 진실이었습니다. 그의 이방인 선교에 대한 이해를 하기 위해서는 바울의 태생과 초기 활동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바울의 사역은 A.D. 30년경부터 시작되는 것으로 초대교회 역사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동참했고 그 자리에 있었던 스데반집사의 순교로부터 이어지는 교회의 대 박해에서 활약을 드러내기 시작한 바울은 이후 A.D.58년 제 3차 전도여행까지 이어지며, 그가 사역할 당시 예루살렘의 분봉왕은 헤롯 아그립바 1세(A.D. 41-44)였습니다. 바울의 유대식 이름인 사울은 사도행전 13장 9절까지 언급되어지고 이후에는 바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우게 됩니다. 바울은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났는데 제롬(Jerome 342-420)에 의하면 바울은 갈릴리에 있는 기살랴에 살다가 로마가 팔레스틴을 정복하던 때에 다소지방으로 이주하였다고 합니다. 유대법은 소년이 다섯 살이 되면 성경공부를 시작하고 열 살이 되면 율법전승을 공부해야 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 역시 어려서부터 이런 교육을 받고 자랐으며 유대인들이 고귀하게 생각하는 육체노동과 지적 능력이 신체적 활동성과 병행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성서와 전통을 공부하는 한편, 당시에 중산층 이상이 가질 수 있었던 직업인 천막 제조 기술을 익혔던 것입니다. 13세가 되면 유대 소년은 「바르미츠바(계명의 아들)」가 되어 전적으로 율법을 지킬 책임을 갖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루살렘에 거하면서 가말리엘(Gamaliel) 1세의 문하에서 조사들의 엄한 율법교육을 받았습니다.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 행22:3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빌3:5 바울이 자란 다소 지역은 상업과 정치권력의 중심지이며 대학도시로써 학문에 대한 열심과 지적 수준이 매우 높았으며 특히 스토아철학자들이 유명했던 지역이었습니다. 또한 국제도시로 세계적 교류가 가능했고 역사적 도시로써 그곳에 사는 시민들은 자부심과 긍지가 대단했습니다. 다소출신의 이방 선교사가 필요했음은 그 지역의 특징으로도 잘 드러나고 있는 것이며 특히 그곳이 이방세계의 물결이 합류되고 모든 세계의 사람들이 무역관계로 이곳에 몰려들었습니다. 바울의 출신 성분과 교육 그리고 그의 삶의 자리였던 다소에서 그는 나면서부터 로마 시민권자로서 당시 외국인이 가질 수 없는 로마 시민권이 있다는 것은 상당한 부유층에 속하는 계급이었을 것이며 가문 역시 물질적, 정신적, 지적 수준이 매우 높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바울이 가졌던 해박한 율법의 지식, 바리새적 훈련, 헬라철학의 소양은 신앙과 결부되어 조화를 이룬 위대한 사상을 가졌으며 그가 복음을 접목한 뒤에는 기독교를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게 전파하기 가장 적합한 이상적인 인물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사람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 행9:11 『바울이 이르되 나는 유대인이라 소읍이 아닌 길리기아 다소 시의 시민이니 청컨대 백성에게 말하기를 허락하라 하니』 행21:39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유대교식 교육과 경험에 나오는 율법과 복음을 전파하는 선교사의 사명에 있어서 문제시 되는 것이 율법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의 율법에 대한 태도는 갈라디아서에서 유대인들의 독특한 관습이나 법들이 처음의 의도와는 달르게 인간의 삶을 제한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유대인들의 선민으로서 관습인 할례와 안식일을 지키는 법, 식사예절 등은 예수님께서 사역하실 당시 바리새인들이 자주 시비거리를 만들던 관습이었습니다. 특히, 할례는 유대인들이 남자아이를 낳은 지 8일 만에 행하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계약의 일부 내용에 따른 것입니다. 이처럼 유대교로 개종하는 모든 남자는 의무적으로 할례를 받도록 되어 있었는데 기독교로 개종해야 하는 사람에게 모두 적용시킨다면 관습에 대한 공포로 전도의 효과는 지금과 같이 않았을 것입니다. 참고로 1세기 할례는 마취도 없이 칼로 남성의 표피를 잘라내는 것이었기에 유대인들과 다른 문화권에 살고 있는 사람에게는 부당한 것이었으며 만약 바울이 할례 받기를 고수했다면 십자가의 도를 전하는데 기존의 유대인들로부터 박해를 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한다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박해를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걸림돌이 제거되었으리니』 갈5:11 그러나 바울의 할례에 대한 관습을 철저하게 저항하며 율법이 생명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속박하고 갇힌 자가 되게 하므로 인간에게서 자유가 없어졌다고 토로했습니다.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과 반대되는 것이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갈3:21~23 사도바울이 전하는 율법의 관습은 진리가 아니며 형식적인 것에 지나지 않으므로 폐지해햐 하는 것이며 그래야만 이방인들에게 십자가의 도를 전할 수 있다고 했던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행위 자체가 인간을 의롭게 하는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인이 된 것처럼 믿음으로 의로다 함을 받게 되며, 그 결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 오피니언
    • 연재
    2023-03-24
  • 쉽고 재미있는 신학 이야기
    미국의 『크리스천 월드』라는 종교 잡지에서 세계 50대 교회 가운데 한국에 있는 교회가 23개가 된다고 보고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는 기독교 역사로 봐도 괄목할만한 성장이며 가부장적인 조선 시대를 거쳐 일제시대 암흑의 시대를 넘어 6·25 동란이라는 전쟁을 겪은 민족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외적인 성장을 중심으로 교인의 수를 확장하는데 열을 올리면서 자연스럽게 한국교회가 사회를 변화시키는 도덕적 영향력이 미미해진 것은 사실입니다. 이는 매일의 뉴스에서 보도되는 것처럼 한국 사회는 폭력이 난무하며 거짓과 부정부패 그리고 타락과 향락, 이기심과 빈부의 격차가 심화하면서 극단적 선택을 하는 사람들도 많아지고 있는 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에서 정치경제 사회적인 문제를 뒷순위로 한다면, 단연 앞장설 것은 교회 부흥과 맞물려 경제를 발전했던 한국이기에 사랑으로 사회를 변화시키길 원하셨던 예수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성실히 이행하지 못한 미성숙한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책임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따르던 무리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돼라’라고 말씀하셨지만, 작금의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하는 이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을 뿐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천국의 비유로 말씀하셨던 것처럼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는 만큼 힘든 사명이 되어버렸습니다. 하나님 은혜에 의한 한국교회의 부흥 성장 이전의 한국 역사를 환란과 고통의 역사라고 한다면, 위대한 성경 인물들의 삶 역시 환란과 고통 속에서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위대한 인물이 된 것을 성경을 통한 증거로 알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로마의 성도들에게 ‘환란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룬다’ 고 전한 것처럼 하나님 은혜의 이면에는 반드시 수반되는 과정으로서의 고난의 길이 있었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위대한 인물들의 성장에서 고난의 경험은 유한한 인간에게 무한한 사랑으로 함께 하시는 절대자의 존재를 인식하고 한계적인 지식에서 은혜에 대한 반응으로의 경험에서 다듬어지며 변화됩니다. 즉 내적 갈등을 수반하며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는 것이며 무한한 하나님의 능력에 순종하게 되고 자신의 한계를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성취 가능하게 하는 겸손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에 속한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고난의 과정은 신앙 성숙으로 가는 유일한 방법이며 자신의 이기를 목적으로 살던 삶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명적인 삶으로의 전환이 되는 거룩한 길입니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성경 인물들의 삶을 조명해 보면서 그들의 삶에 내포된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게 하고 각자의 환경에서 순종하는 방법과 주신 사명에 대한 깨달음이 있기를 기대합니다. 실천하는 소망공동체
    • 오피니언
    • 연재
    2023-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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