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구덩이를 상징하는 큼지막한 노란 현수막 위에 하얀 방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서 있다. ‘공권력’ ‘과학 방역’이란 이름표를 가슴팍에 단 이들은 ‘윙’하는 사이렌 소리에 두리번거린다. “이 절차는 농장 동물, 유해 동물, 야생 동물을 대상으로 하며 감염병 확산 방지와 개체 수 관리 등을 목적으로 시행됩니다”란 방송이 함께 울려 퍼진다.
인근에 서 있던 닭, 돼지, 개, 고라니, 비둘기 가면을 쓴 이들이 사이렌 소리에 도망간다. 방역원들이 그 뒤를 쫓고 개 짖는 소리, 닭 우는 소리 등이 이어진다.
잡혀 온 동물들은 노란 현수막으로 표현한 흙구덩이로 들어간다. 방역원들은 그 위를 또 다른 노란 현수막으로 덮어버린다. 꿈틀거리던 동물들의 몸부림이 이내 멈춘다. 울음소리도 점차 작아진다.
시민단체 ‘살처분폐지연대’는 15일 정오 서울역 광장에서 ‘2026 살처분 반대 액션’을 진행했다. 이들은 조류인플루엔자(AI) 예방을 이유로 이번 겨울에만 산란계 1000만마리가 살처분된 것을 비판하기 위해 이같은 행사를 마련했다. 이들은 “인간만을 위해, 자본의 논리에 따라 비인간 동물을 처분하는 학살을 멈춰야 한다”고 말했다.
경기 화성 산안마을에서 양계업을 하는 이경묵씨는 2021년과 2025년 두 차례에 걸쳐 예방 목적과 감염 발생으로 수만 마리의 닭을 잃었다. 이씨는 “우리는 닭의 생명을 끝까지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무력감을 느낀다”며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HPAI)가 한국에 들어온 지 23년이 됐지만 병에 걸릴 것 같다고, 걸렸다고 그냥 죽이는 살처분 중심의 차단 방역밖엔 없다”고 말했다.
같이 양계업을 하는 아내 세레나씨도 “많은 국가가 HPAI를 통제하고 비인도적인 살처분과 그로 인한 끔찍한 결과를 피하려고 백신 접종으로 방역 정책을 전환하고 있다”며 “코로나가 발생했을 때 서둘러 백신을 개발해 인간을 보호하는데, 수천만 마리의 동물들이 죽임을 당할 때는 그들을 내버려 둔다”고 말했다.
이들은 직접 죽이지 않더라고 경제적 이윤에 따라 생명을 물건처럼 처분하고 폐기하는 행위 역시 살처분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고광현 강화동물연대 활동가는 “들개들은 위험하고 많아졌다는 이유로 무차별 포획돼서 죽음을 맞이하고 있다”며 “보호소 안락사는 안락한 죽음이 아닌, 공간이 부족하거나 입양이 되지 않아서, 관리가 벅차다는 이유로 당하는 밀어내기식 죽음”이라고 말했다.
이들은 “기후 변화, 도시화, 무분별한 유통 등 인간 활동에 따라 인간 사회에 들어온 존재들은 이제 ‘유해 야생동물’이 됐고 이런 동물들은 합법적으로 집단 포획되고 살처분된다”며 “야생동물의 삶 역시 경제성과 효율성을 기준으로 쉽게 제거되고 대량학살은 또다시 정당화되고 있다”고 말했다.
단체는 정부에 “예방 살처분을 포함한 무분별한 살처분 정책을 중단하고 생명을 존중하는 과정으로서 대안을 마련하라”며 “야생동물과 농가와의 갈등을 살처분이 아닌 공존을 모색하는 방법으로서 해법을 제시하라”고 말했다. 이어 “내년 2월부터 시행될 개 식용 금지 법안에 따라 잔여견 50만명(마리)의 개들을 위한 대책을 조속히 마련하라”고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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