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사회는 왜 낯선 이의 칼날 앞에 무너지는가
지난 5일 새벽, 광주 광산구의 한 인도에서 17살 여고생이 귀가 중 낯선 남성의 흉기에 목숨을 잃었다.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는 아무런 접점이 없었다. 원한도, 이유도, 관계도 없었다. 오직 그 시간, 그 장소에 있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한 생명이 사라졌다.
우리는 이런 범죄를 '묻지마 범죄'라 부른다. 그리고 이 단어가 뉴스에 등장할 때마다, 우리는 모두 잠재적 피해자가 된다는 공포를 느낀다.
묻지마 범죄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2012년 수원 토막살인 사건은 온 나라를 경악하게 했다. 피해 여성은 단지 귀갓길에 납치됐다는 이유만으로 처참한 죽음을 맞았다.
2019년 진주 아파트 방화·살인 사건에서는 안인득이 자신의 아파트에 불을 지르고 대피하는 주민들을 흉기로 무차별 공격해 5명이 사망했다.
2023년 서현역 흉기 난동 사건에서는 한 남성이 백화점 안에서 불특정 다수를 향해 흉기를 휘둘러 1명이 숨지고 13명이 다쳤다.
같은 해 신림역 인근에서도 유사한 흉기 난동이 발생했다. 그리고 이제, 2025년 광주의 새벽 인도 위에서 또 한 명의 십대가 희생됐다.
사건은 달라도 패턴은 같다. 불특정 피해자, 돌발적 공격, 그리고 납득할 수 없는 이유. 반복되는 비극 속에서 우리 사회는 아직 근본적인 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묻지마 범죄의 원인은 단순하지 않다. 전문가들은 크게 세 가지 층위에서 그 배경을 분석한다.
첫째, 사회적 고립과 박탈감이다.
가해자 상당수는 범행 전 극심한 사회적 고립 상태에 놓여 있었다는 공통점을 보인다. 실직, 대인관계 단절, 경제적 빈곤이 누적되면서 세상 전체를 적으로 인식하게 되는 심리적 왜곡이 발생한다.
이번 광주 사건의 피의자 역시 "죽으려 생각하다가 충동적으로 범행했다"고 진술했다. 자해 충동이 타인을 향한 공격성으로 전환된 전형적인 사례다.
둘째, 정신건강 문제의 사각지대다.
우리 사회의 정신건강 지원 체계는 여전히 취약하다. 자살 충동, 망상, 반사회적 성격장애 등 위험 신호를 조기에 감지하고 개입할 수 있는 사회 안전망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범행 전 이상 징후가 있었더라도 이를 포착하고 대응할 시스템이 부재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셋째, 모방 효과와 미디어의 역할이다.
묻지마 범죄가 대대적으로 보도될 때마다, 유사 범행에 대한 예고나 위협이 온라인에 급증한다. 언론의 자극적 보도가 의도치 않게 범행 방식을 전파하고, 일부 잠재적 가해자에게 자신의 분노를 표출할 수단을 '학습'시키는 역효과를 낳는다는 지적이 전문가들 사이에서 꾸준히 제기된다.
해법은 개인의 수준, 사회의 수준, 국가의 수준 모두에서 동시에 모색되어야 한다.
▶ 국가 차원에서는 정신건강 안전망을 대폭 강화해야 한다.
자살 충동이나 반사회적 성향을 가진 고위험군을 조기에 발굴하고 지속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지역사회 기반의 정신건강 지원 시스템이 필요하다. 현재의 정신건강복지센터는 인력과 예산 모두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범죄 예방을 복지 문제로 접근하는 시각의 전환이 요구된다.
▶사법 및 치안 차원에서는 위험 신호 감지 체계를 정비해야 한다.
온라인 범행 예고, 주변인의 신고, 과거 전과 이력 등을 통합적으로 분석해 범행 가능성이 높은 인물을 선제적으로 관리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이미 일부 선진국에서는 '위협 평가 팀(Threat Assessment Team)'을 운영하며 잠재적 위험 인물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있다.
사회 차원에서는 고립된 개인을 연결하는 공동체의 회복이 필요하다. 묻지마 범죄의 온상은 결국 단절과 고립이다. 이웃과의 관계, 지역사회의 유대, 취약계층을 향한 사회적 관심이 살아 있을 때, 범행의 씨앗은 자라기 어렵다.
공동체의 회복은 가장 느리지만 가장 근본적인 해법이다.
▶개인 차원에서는 위기 상황 대응 요령을 익혀두는 것이 현실적이다.
흉기 난동 상황에서는 즉시 현장을 이탈하고, 도망이 불가능할 경우 장애물을 방패 삼아 거리를 유지하며 큰 소리로 주변에 알려야 한다. 용감한 제압보다 신속한 신고와 대피가 우선이다.
늦은 밤 혼자 걷는 것이 목숨을 건 도박이 되어서는 안 된다. 아무 이유 없이 타인의 칼날 앞에 쓰러지는 일이 '운이 나빴다'는 말로 마무리되어서는 안 된다. 묻지마 범죄는 개인의 비극이기 이전에, 사회가 누군가를 제때 붙잡지 못한 실패의 결과다.
17살 소녀의 죽음이 또 다른 죽음으로 이어지지 않으려면, 우리는 이 불편한 질문을 계속 던져야 한다. 우리 사회는 지금 충분히 안전한가. 그리고 충분히 연결되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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